[2016.10.20] 과학과 낭만의 아름다운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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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낭만의 아름다운 이중주

칼 세이건의 『지구의 속삭임』

1977년 8월 20일 보이저 2호가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목성에 더 빨리 도착할 뿐 아니라, 더 빠른 속도로 태양계를 떠날 예정이었기에, 형보다 나은 동생이 될 보이저 1호가 16일 후인 9월 5일 출발했다.

1977년 8월 20일, 플로리다 주 케이프커내버럴의 케네디 우주 비행센터에서 보이저 2호가 발사되는 모습. NASA 제공. / 『지구의 속삭임』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관광지의 기둥에서, 신학기 새 교실의 책상에서, 헌 책의 귀퉁이에서 우리는 앞선 이들의 흔적을 발견한다. 어쩌면 이것은 배설물이나 물리적 흔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했던 동물적 본성에서 유래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좀 더 시적인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유한한 수명을 가진 필멸자의 한계를 보상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 글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앤 드루얀은 이런 의미에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살았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언어는 영원에 도전한다.” 드루얀은 호라티우스의 말을 우리의 기억 자체가 그의 말에 대한 증명이라고 이야기한다. 호라티우스의 말이 살아남은 2000 년은 긴 시간이다. 그러나 보이저호는 말 그대로 인간에게는 영원과 다름 없는 시간에 도전하고 있다.

흔적을 남기려는 마음은, 미래를 기약하는 마음이다. 어린 시절 동네의 조숙한 아이에게 이끌려서 뒷산 나무 밑에 무언가를 묻고, 10년 뒤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나눈, 혹은 그와 비슷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어른들도 이런 일을 한다. 단지 타임 캡슐이라는, 시간을 가로 지른다는 의미의 더 그럴듯한 이름이 붙어 있다. 시간을 압축하는 것은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선사한다. 학창 시절을 다루는 드라마는, 마지막 회에 이들이 어른이 된 이후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픽사의 명작 「업(Up)」에서 칼과 엘리의 인생이 축약되어 펼쳐지는 초반의 몇 분을, 많은 이들은 가장 감동적인 영화 도입부로 꼽는다. 어린 시절의 골동품 상자를 어른이 되어서 열어 볼 때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보이저 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를 직접 제작한 이들이, 그 레코드의 내용을 설명한 『지구의 속삭임』을 읽는 내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보이저호는 수천, 수십만, 수억 년 뒤에도 우주를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레코드의 내용을 준비하는 이들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들이 우주적 규모의 타임캡슐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타임캡슐을 여는 이가 어떤 지적인 능력을 가졌을지, 그리고 과연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생명과 조우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이 골든 레코드의 진정한 수신자는 바로 우리 인류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자문 위원들은 이 점 또한 잘 이해했다. 자문 위원 중 한 명인 HP의 버나드 올리버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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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단 한 명이라도 금속판을 볼 가능성은 극히 작지만, 지구인은 틀림없이 수십 억 명이 보게 될 겁니다. 따라서 금속판의 진정한 기능은 인류의 기상에 호소하고 그것을 북돋는 것, 외계 지적 생명체와의 접촉을 인류가 반갑게 기대할 사건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보이저호의 일부 특징들을 보여 주는 우주선 구조도. 행성 쪽을 향한 기기들이 대부분 설치되어 있는 이른바 스캐닝 플랫폼이 맨 위쪽에 있다. NASA 제공. / 『지구의 속삭임』에서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우주로 보내는 메시지가 바로 인류를 향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다. 『지구의 속삭임』에는 이런 우주적 규모의 타임캡슐이 모두 네 번 등장하며, 어떻게 이 사람들이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를 점점 더 깨달아 가면서 그 내용을 가다듬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것은 시간 순서대로 파이오니어 10호(1972)/11호(1973), 아레시보 성간 메시지(1974), 라지오스(LAGEOS, 1976), 보이저 1호/2호(1977)이다. 각각에 포함된 메시지들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 예를 들어 아레시보 성간 메시지는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에 쏘아진 전파 신호인 반면, 나머지 세 건은 모두 알미늄이나 구리 등의 물리적 실체가 우주로 발사됐다. 그리고 라지오스는 지구 상공을 돌다가 800만년 뒤 지표면에 추락할 예정으로, 다름 아닌 바로 지구의 후손에게 보내는 진정한 의미의 타임캡슐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보다 더 분명한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미지의 존재에게 과연 무엇을 전달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것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각 메시지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파이오니어 10호와 11호에 부착된 금속판 사진. / 『지구의 속삭임』에서

1972년과 1973년에 첫 번째로 지구를 떠난 파이오니어 10호와 11호에는, 모두가 한 번은 보았을, 옷을 입지 않은 두 남녀가 외계인을 환영하는 모습의 그림이 실렸다. 좌측 상단에는 이 그림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인, 시간과 거리의 단위인 수소 원자가 있으며 좌측에는 이 단위를 바탕으로 주기적으로 밝기가 변하는 펄사들을 이용해, 우주에서 태양계의 상대적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그림이, 그리고 하단에는 태양계 내의 행성들과 지구를 나타낸 그림이 있어서 이것들로써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말한다. 그리고 우측에는 파이오니어를 배경으로 한 남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누구인가’를 이야기했다.

1974년 11월에 아레시보 천문대는 전파 망원경과 발전기를 새로 단장해서 우주로 메시지를 보낼 준비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1,679개의 이진수로 이루어진 신호로 만든 그림을 보냈다. 이 그림에는 이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1에서 10까지의 숫자, 그리고 원소들의 원자 번호를 이용한 DNA와 인간의 모습을 담아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했고, 태양계와 이 신호를 전송하는 아레시보 천문대의 모습을 담아, 우리가 어디에서 이 신호를 전송하는지 설명했다.

1976년 발사된 라지오스(LAGEOS)는 레이저 지구 역학 위성(Laser Geodynamic Satellite)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다. 이 위성은 100년에 2.5센티미터씩 움직이는 대륙의 움직임을 측정하기 위해 발사된 것으로, 약 800만 년 뒤에 수명을 다해 지구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위성에는 역시 1에서 10까지의 숫자, 그리고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그림과 숫자 1을 이용해서 시간 단위를 알려주고, 약 3억 년 전 하나의 대륙이었던 지구의 모습, 위성이 쏘아질 때(현재) 지구의 모습, 그리고 약 800만 년 뒤로 예상되는 지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즉 이 위성을 발견할 이들이 세계 지도를 지녔다면, 이들은 이 위성이 800만년 전에 지구에서 쏘아 올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드디어 1977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는 보이저호에 실을 메시지를 준비하며 다시 칼 세이건을 부른다. 세이언과 그가 소집한 자문 위원들은 처음에는 파이오니어에 탑재한 금속판에 아레시보에 포함했던 DNA 정보를 넣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메시지가 또한 인류 전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역시 물리적인 기록 방법이므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축음기용 레코드판을 이용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지구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각국의 대사들이 참여하고 지구의 상당수 언어로 녹음한 인사말, 지구의 소리, 지구의 음악 등 앞선 시도들과는 차원이 다른, 다양한 내용들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지구의 속삭임』은 바로 이 골든 레코드에 수록된 내용을 담당한 이들이 직접 설명한 책이다.

보이저호 앞에서 촬영한 골든 레코드의 모습.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세이건 역시 수학의 우주적 보편성과 수학과 음악의 관계를 통해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바로 골든 레코드에 실린 음악들을 설명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세이건은 후대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이렇게 사용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각 음악에 대한 설명과 이 곡들을 수록하게 다양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유튜브에 올라온 보이저 골든 레코드의 음악을 직접 하나하나 감상했던 시간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로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안타깝게도 몇몇 곡은 저작권 때문에 재생되지 않는다.) 세이건이 인용한, 드루얀의 다음 회상을 보자.

로버트 브라운이 우주로 보낼 월드 뮤직 목록에서 맨 위에 적은 곡은 수르슈리 케사르 바이 케르카르(Surshri Kesar Bai Kerkar)가 부른 「자트 카한 호(Jaat Kahan Ho)」였어요. 최근에 절판된 오래된 녹음이었죠. 음반 가게 수십 곳을 뒤졌지만 다 없어서, 브라운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라가(raga, 인도 전통 음악)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는 거절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그 곡의 녹음을 제때 발견하지 못해서 레코드판에 못 실으면 어쩌죠?” 나는 하소연했어요. 선곡을 마무리하기까지 사흘이 남은 상황이었죠.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환상적인 음악 전통 중 하나인 인도 음악을 포함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엄청나게 걱정됐어요.

그는 “계속 찾아보세요”라고 말하더군요.

다음날 여러 사서들과 문화 공보관들에게 묻고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다시 그에게 전화했을 때, 나는 절박했어요.

“「자트 카한 호」는 계속 찾아볼게요.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다른 곡을 한 곡만 더 알려주세요. 그다음으로 훌륭한 곡은 뭐죠?”

브라운은 “그 곡에 범접할 곡은 없어요. 계속 찾아보세요.”라고 고집했어요. 내가 다른 민족 음악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다들 브라운을 믿으라더군요. 나는 인도 식당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어요.

뉴욕 20번가 렉싱턴 애비뉴에 인도인 가족이 운영하는 전자 제품 가게가 있어요. 그곳에 카드 게임용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탁자를 덮은 마드라스 천 밑에 먼지 쌓인 갈색 통이 있었고, 그  속에 뜯지 않은 <자트 카한 호> 음반이 세 장 들어 있더군요. 가게 주인들은 내가 세 장을 몽땅 구입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추측을 늘어놓았죠. 나는 어서 들어보고 싶어서 가게를 뛰쳐나와 쏜살같이 집으로 달렸어요.

정말이지 전율하게 만드는 음악이었죠. 나는 브라운에게 전화해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어요.*

*<자트 카한 호>는 유튜브에서는 재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메오(Vimeo)에서 들을 수 있다. [바로가기]

파이오니어 11호가 찍은 목성의 사진. 중앙에 대적반이 보인다. NASA 제공. / 『지구의 속삭임』에서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하나는, 골든 레코드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이 적은 예산으로 쪼들리면서도, 우주로 날아가 영원히 남을 메시지를 선정하면서 상업적인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기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날 다시 이런 프로젝트가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지구적 관심을 끌 예정이며,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이들이 넘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수익 사업이 전개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구리가 아니라 백금으로 레코드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우리가 보이저호 이야기를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낭만을 느끼기는 어려우리라.

보이저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는 지구와 태양이 수명을 다하는 수십 억 년 뒤에도 우주 저 편 어딘가를 날아가며 자신을 읽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속삭임』 표지

[2016.09.13]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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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필립 볼의 형태학 3부작

수년 전 『모양』, 『흐름』, 『가지』라는 독특한 제목의 (그리고 눈에 띄는 표지로 무장한) 형태학  3부작으로 과학책 팬들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던 필립 볼은 20년간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의 편집자와 편집 고문으로 일한 과학 편집자이자, 20권 이상의 교양 과학 서적을 펴낸 과학 저술가이다. 역시 《네이처》의 편집자 출신인 뛰어난 과학 저술가 한 사람이 더 떠오른다. 바로 사회적 원자』『내일의 경제』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마크 뷰캐넌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한 살 차이이며 모두 물리학 박사이기도 하다.

과학 저널의 편집자로 일하는 것과 좋은 작가가 되는 일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 듯하다. 저널의 편집자는 투고되는 논문을 읽고 평가해야 한다. 깜짝 놀랄 만한 과학적 발견이 반드시 뛰어난 글 솜씨로 발표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좋은 논문은 좋은 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좋은 논문이란 저자의 연구 동기와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 모두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쓰여져야 하며, 독자는 이를 통해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다. 곧, 좋은 논문은 과학 글쓰기의 훌륭한 모범이다.

따라서 과학 저널의 편집자는 좋은 글쓰기의 3대 조건이라 할 다독, 다작, 다상량을 직업 속에서 행할 수 있다. 게다가 과학 저널의 편집자는 첨단 과학의 최전선을 항상 떠나지 않는다. 특히 《네이처》나 《사이언스》와 같이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저널의 편집자라면, 하루하루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넓고 깊게 만드는 날들의 연속일 것이다. 국내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음악 본능(Music Instinct)』(2010년)이나 『인조 인간, 인간을 만들겠다는 기이한 시도들(Unnatural, The Heretical Idea of Making People)』(2011년), 『투명성: 보이지 않음에 대한 위험한 유혹(Invisible: The Dangerous Allure of the Unseen)』(2015년)과 같은 필립 볼이 저술한 책의 제목들이 이 사실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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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과 저술의 재능을 겸비한 탁월한 과학 저술가

또한 그는 다양한 매체에 매우 다양한 주제의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13년에 디지털 잡지인 《이온(AEON)》에 발표한 글에서는 물건을 고치는 행위가 곧 창조가 되는 일본의 ‘와비-사비’와 ‘아소비’라는 문화를 소개했으며, 지난해 《노틸러스(Nautil.us)》를 통해서는 진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독특한 탐색 공간의 위상 구조에 있음을 알려주는 최신 연구 결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같은 매체에 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과학 분야의 재현성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의학계처럼 연구 디자인을 실험에 앞서 미리 등록하자는 버지니아의 심리학자 브라이언 노섹의 흥미로운 제안을 전하기도 했다. 이 글들은 모두 《뉴스페퍼민트》에서 번역, 소개한 바 있다.*

《이온》에 발표한 글 [바로가기]

《노틸러스》에 발표한 글 [바로가기]

노섹의 제안을 소개한 글 [바로가기]

눈송이는 우연(가지들이 처음 솟아나는 과정)과 필연(육각 대칭의 구조)의 섬세한 균형을 보여 준다.


우연과 필연의 섬세한 균형점 ‘패턴’

『모양』, 『흐름』, 『가지』는 그가 1999년 출간한 『스스로 짜이는 융단: 자연의 패턴 형성(The Self-made Tapestry: Pattern Formation in Nature)』(1999년)을 3부작으로 확장한 책이다. 한국어판 출판사는 이 시리즈에 ‘형태학 3부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개념인 ‘패턴’을 의식한 이름짓기였을 것이다.

패턴이란 무작위의 반대말이며, 반복, 규칙, 균형과 가까운 말이다. 물론 저자는 이 시리즈의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이 시리즈를 통해 “’패턴의 대통일 이론’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연의 다양한 패턴에 몇몇 공통적인 과정이 있다고 말하며, 그 과정의 미묘한 변화와 초기 조건, 경계 조건의 차이에 따라 ‘환상적인 다양성’이 전개된다고 말한다. 이 시리즈 전체는 바로 이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형태학 3부작을 읽는 동안 나는 저자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이 시리즈가 ‘패턴’을 이야기 하기에 특히 자주 강조되는 것으로, 바로 인간의 “무작위에서 패턴을 찾으려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그는 『가지』에서 두 종류의 비슷하게 생긴 가지를 이야기하며 이들은 정말 비슷하게 생겼고 따라서 이들이 만들어진 과정 역시 관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이런 인간의 직관은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분명히 강조한다.

에인절피시는 자라면서 그 줄무늬가 계속 발달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질서에서 패턴을 찾는 존재

물론 필립 볼은 인간의 이런 오류를 변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과학과 신비주의의 대립을 이야기할 때,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세상이 누군가가 설계한 것이므로 질서와 패턴이 당연하며 따라서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오히려 과학적 관점에서 왜 자연에는 질서와 패턴이 나타나는지를 밝혔을 때 더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고 먼저 말한 뒤,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질서와 패턴이 있으리라는 기대 덕분에, 자연에 존재하는 규칙성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고 덧붙이는 식이다.

그도 짧게 언급하지만, 인간이 화성 표면에서 얼굴을 찾는 ‘파레이돌리아’ 현상처럼 무작위에서 패턴을 찾는 이유는 이 능력이 생존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간단한 가설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쌍의 빛을 적이나 포식자의 눈으로 조금 더 쉽게 간주할 때 생존 확률은 더 올라갔을 수 있다. 하지만 수비학과 점성술, 연금술과 동종 요법 등의 비과학적 접근들도 그러한 오류의 결과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더욱 유사성에의 과도한 집착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필립 볼이 소개하는 도시의 성장을 프랙털 이론으로 설명하는 부분도 어쩌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실은 복잡계 물리학에서는 기본적인 내용인) 프랙털 차원이라는 개념 한 가지를 마저 이야기하려 한다. 차원이란 자유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정수의 차원만을 주로 다루었다. 1차원은 직선이며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공간을 의미한다. 직선, 평면, 공간 위의 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숫자의 개수로 차원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그 대상을 어떤 비율로 늘였을 때, 그 대상이 비율의 몇 제곱으로 늘어나는지가 차원이 된다. 예를 들어, 면적은 길이의 제곱에, 부피는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프랙털 차원이란 특정한 곡선이, 예를 들어 1.71차원과 같이 정수가 아닌 차원을 가질 때를 말한다.

정수가 아닌 차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비만을 나타내는 값 중 BMI라는 지수가 있다. 이는 체중(Kg)을 키(m)의 제곱으로 나눈 것으로 대체로 25를 기준으로 비만을 이야기한다. 왜 제곱일까? 만약 키가 자랄 때 좌우 및 앞뒤로는 전혀 변화가 없다면 체중과 키는 선형으로, 곧 키가 커진 만큼 체중도 커질 것이다. 반대로 키가 클 때 좌우 양옆과 앞뒤로 각각 같은 비율로 늘어난다면, 체중은 키의 세제곱으로 증가해야 한다. 키가 작은 사람과 큰 사람을 생각해 보면 실제 값은 이 1과 3의 중간에 있을 것이다. BMI 는 계산의 편의를 위해 그 사이인 제곱을 택한 값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인구 데이터에 따라 인간의 실제 값은 2.3과 2.7 사이를 나타낸다고 한다. (간단한 선형 대수 과제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이 결과가 인간이 프랙털 차원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키와 체중의 관계가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정수가 아닌 차원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해 보자는 뜻에서 들어 보았다.

[2016.08.31] 수학이 바꾼 세상에 관한 책

수학이 바꾼 세상에 관한 책

이언 스튜어트의 『세계를 바꾼 17가지 방정식』을 읽고

많은 이들이 수학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학생 시절에 어렵게 배운 수학을 평생 다시는 쓰지 않았다는 불평도 들린다. 그렇다면 수학은 왜 배워야 할까? 과연 수학은 정말로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언 스튜어트의 『세계를 바꾼 17가지 방정식』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수학이 현대 사회 곳곳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쓰이는지 알려준다. 동시에 수학을 알면 알수록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스티븐 호킹이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를 쓸 당시에, 출판사에서 방정식 하나를 책에 넣을 때마다 매출이 반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럼에도 호킹은 E=mc²을 기어이 넣었고, 출판사는 그 식만 없었다면 이 책의 매출이 1000만 달러는 더 늘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언 스튜어트는 이런 출판계의 상식을 무시한 듯하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17개의 방정식 때문에 이 책의 매출이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수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 바꾼 세상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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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꾼 17개의 방정식들을 정리한 표이다. 이 방정식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피타고라스 방정식을 시작으로 책에 등장하는 17개의 방정식은 각 방정식 혹은 개념이 수학의 역사에 등장한 순서에 따라, 각각 한 장을 맡았다. 그리고 각 장에서는 이 방정식의 개념들이 탄생한 연원과 이후로 세상을 바꾸어 온 방식, 그리고 우리가 놓치기 쉬운 현대 사회의 곳곳에서 이 방정식들이 활용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바이올린 현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파동 방정식은 150년 뒤에 지진파인 P파(종파)와 S파(횡파)를 설명해 냈다. 특히 1906년에 지질학자인 리처드 올덤은 지진파가 지구의 내부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지구 내핵의 바깥층이 S파가 통과할 수 없는 액체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후일 이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또한 오늘날 석유 회사들은 파동을 지하로 내려보내서 반사된 파를 측정함으로써 탐사 지역의 지질학적 특성을 파악한다.

유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을 다룬 장에서는 오늘날 이 방정식을 이용해 우리가 인체 혈관 내의 혈류를 계산하게 됐으며, 더 나아가 혈관이 막히는 것을 막기 위해 집어넣는 금속관인 스텐트의 디자인에 이 방정식이 쓰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방정식의 효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와 함께 변화하는 중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도 수학이 세상을 바꾸는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 1940년대에 등장한 클로드 섀넌의 정보 이론은 통신, 특히 무선 통신의 이론적 근거가 됨으로써 21세기 정보화 사회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서 우리 눈에는 무작위로 보이는 현상 속에 숨은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카오스 이론이 등장했으며, 파생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블랙-숄즈 방정식은 금융 시장을 뒤흔들었다.

다양한 상품들의 가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계산해 내는 현대 수학은 금융 시장을 작동시키는 핵심 원리이다. 세계 경제의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방정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깊게 해 준다. 스튜어트는 로그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이 인식하는 감각의 크기가 로그에 비례한다는 베버-페히너의 법칙을 설명한다. 이 법칙은 우리가 접하는 자극, 곧 소리나 빛의 경우에 가장 작은 자극과 가장 큰 자극의 범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인간은 로그의 단위로 자극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소음의 단위인 데시벨이 바로 그런 개념을 포함한다. 데시벨은 밑을 10으로 하는 로그 단위로 에너지를 바꾼 것이다. 1미터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대화 소리는 40~60데시벨 사이이다. 실제로 50데시벨은 40데시벨 소리보다 에너지가 무려 10배이고, 60데시벨의 소리는 50데시벨보다 10배의 에너지이지만 인간은 이렇게 큰 에너지 차이를 가진 소리를 편안히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로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인상 깊게 본 동영상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로그는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중등 수학의 장애물 중 하나이다. 사람들이 로그를 특히 어렵게 느끼는 원인 중에는 로그의 표기법이 복잡하고 직관적이지 않다는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래에 소개한 동영상은 지수, 제곱근, 로그라는 세 개념이 실은 하나이며, 삼각형 하나로 모두를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삼각형의 세 숫자 중 둘을 알 때 나머지 하나를 찾는 수단이 바로 지수, 제곱근, 로그임을 설명한다. 수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음 링크의 그림만으로도 세 개념 사이의 놀라운 대칭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 [바로가기]

영상 [바로가기]

『세계를 바꾼 17가지 방정식』 표지

마지막으로 이 책의 머릿말에 소개된 학문의 가치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왕립학회에서 전기와 자기의 관계를 시연할 때,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것을 어디에 쓸 수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패러데이 역시 “예, 각하. 언젠가는 거기에 세금을 물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올 여름 무더위는 전기 누진세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고, 우리가 전기를 사용한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요금인지 세금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무더위가 가셨다고 해서 이 여름의  논의들이 결론 없이 흐지부지 되지 않기를 바란다.

[2016.11.29] “스포츠 유전자”

https://brunch.co.kr/@bpark/83

데이비드 엡스타인의 책 “스포츠 유전자(The Sports Gene)”는 스포츠 분야에서 유전자와 환경, 곧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효과를 다룬 책입니다. 물론 오늘날 본성과 양육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승리를 말하기 어려운 개념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동등할 때 누구나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빈 서판’이론의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키와 체형과 같은 육체적 특징 뿐 아니라 정신적 특징 또한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알려지고 있는 후성 유전자는 환경이 어떻게 다시 유전자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지와 함께 이 두 요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말해 줍니다. 엡스타인 또한 이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사실 운동능력을 전적으로 본성이나 양육 어느 한쪽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는 모두 허수아비 논법일 뿐이다. 전 세계의 모든 운동선수들이 일란성 쌍둥이라면, 누가 올림픽에 나가고 직업 선수가 될지는 오로지 환경과 연습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반대로 전 세계의 모든 운동선수가 똑같은 방식으로 훈련 받는다면, 오로지 유전자에 따라 경기력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양쪽 시나리오는 둘 다 들어맞지 않는다.” – P.401

하지만 적어도 운동능력에 있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예들은, 비록 두 요인이 모두 중요하다 하더라도 유전적 요인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수많은 실제 예들이 등장한다는 것인데, 바로 위의 표현 다음에도 이런 예를 말해 줍니다. 곧, 일란성 쌍둥이지만 서로 다르게 훈련을 받은 미국의 멜리사 바버와 미켈레 바버는 100미터 최고 기록이 겨우 0.07초 차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 책은 시작부터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주장해 유명해진 ‘1만 시간의 법칙’을 반박합니다. 오늘날 ‘1만 시간의 법칙’은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육’진영의 사람들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누구나 1만 시간을 훈련하면 그 분야의 정상에 설 수 있다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2004년 올림픽 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스웨덴의 스테판 홀름은 6살때 높이뛰기를 시작했으며 금메달을 따기까지 20,000 시간의 훈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2007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스네판 홀름을 물리치고 우승한 선수는 높이뛰기를 시작한지 겨우 8개월 된 바하마의 도날드 토마스였습니다.

이 책의 곳곳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왜 20세기 동안 세계 기록은 끝없이 경신되었고 최근 그 추세가 주춤해진 것일까요? 일부는 해당 종목을 둘러싼 기술의 발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1930년대 전설적인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의 동영상을 생체 역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칼 루이스의 관절만큼 빨리 움직였다고 합니다. 단지 오언스는 후에 발명된 합성수지 트랙보다 훨씬 달리기 힘든 트랙을 달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엡스타인이 말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체형의 빅뱅”이라는 것으로,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평균적인 체형을 가진 이들이 스포츠에 참여했지만, 20세기 동안 스포츠 우승자들에 대한 보상이 커지면서 각 종목에 최적화된 체형을 가진 이들이 각 종목을 석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925년에는 배구선수와 원반 던지기 선수, 높이 뛰기 선수의 몸집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투포환 선수는 높이뛰기 선수보다 평균 6.4 cm 크고, 59 킬로그램이 더 무겁습니다. 체조선수의 키는 160cm 에서 145cm 로 줄었지만 대다수의 스포츠 종목에서 선수들의 키는 계속 커졌습니다. NFL 에서는 키 1cm 와 몸무게 3kg 마다 연봉이 5천만원씩 올라갑니다.

키와 몸무게만이 아니라 신체 구조에도 종목별로 최적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수구 선수들은 팔이 길어졌고, 특히 효율적인 던지기를 위해 아래 팔이 위 팔보다 더 길어졌습니다. 카누와 카약 선수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반면, 역도 선수들은 쉽게 머리 위로 바벨을 들기 위해 팔이 짧아졌고, 특히 아래 팔이 더 짧아 졌습니다. 농구와 배구 같이 점프가 필요한 종목의 선수들은 다리가 길어졌지만 권투 선수들은 무게 중심을 낮춰 안정된 자세로 팔을 뻗기 위해 팔은 길어지고 다리는 짧아졌습니다.

즉 기록의 경신은 이러한 체형의 변화에서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1500미터 달리기가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매 10년마다 8번 정도 경신되었지만, 2000년 이후로는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은 곧 이런 기록 경신의 시대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물론 우사인 볼트의 예외가 있고, 저자는 우사인 볼트의 성공이 다른 종목에서 큰 키와 폭발력을 갖춘 이들이 단거리 육상으로 종목을 바꿀지가 흥미롭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에 나오는 작은 일화들 하나하나에서 (예를 들어 NBA 에서 스타로 활약했던 야오 밍은 중국 정부가 중매를 서서 맺어진, 전직 남녀 농구 선수인 중국 최장신 부부의 아들이라는군요) 즐거움을 느낄 겁니다.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 그리고 최신 연구결과들이 궁금한 사람들도 물론이며, 인간의 한계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추천합니다.

[2016.10.25]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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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과거 CIA 와 NSA 에서 일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가디언을 통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와 영국의 정보기관이 자국의 시민들 뿐 아니라 전세계의 통화기록 및 인터넷 사용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 사찰하고 있음을 폭로했습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이 사건에 대한 여러 언론의 보도를 실었고, 스노든에 관한 책을 쓰던 한 저자가 겪은 일도 소개했습니다. http://newspeppermint.com/2014/02/24/snowden/ “스노든 파일”을 쓴 루크 하딩에 따르면 가디언에 스노든 기사가 올라온 직후, 가디언의 뉴욕 사무실과 워싱턴 사무실 앞 보도블럭 교체공사가 동시에 시작되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노든 사건은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세계 최고의 보안 전문가”라 불리는 브루스 슈나이어의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남기는 데이터들을 기업과 정부가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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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을 때마다 당신은 이동 통신사와 암묵적인 거래를 하고 있다. “전화를 걸고 싶습니다. 대신 당신네 회사가 나의 위치를 항상 알 수 있게 해주지요.” 그 내용은 어떤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비스의 작동방식에 내재해 있다. … 이는 아주 은밀한 형태의 감시이다. 당신의 휴대폰은 당신이 사는 곳, 당신이 일하는 곳을 추적한다.그리고 주말과 저녁을 주로 어디서 보내는지, 얼마나 자주 교회에 가는지(그리고 어느 교회에 가는지), 술집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그리고 운전할 때 속도를 내는지 추적한다. 또 당신이 위치한 지역 내의 다른 모든 전화에 관해서도 알고 있으므로 당신이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점심 때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와 자는지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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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화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스마트폰에 들어온 서비스 중에 우리의 위치를 요구하는 서비스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지도와 네비게이션이 위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사진 앱은 내가 사진을 찍은 곳을 기록하기 위해 이를 요구합니다. 배달 서비스와 음식점 추천 앱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위치 정보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수집한 위치 정보는 원래의 목적 이외에 적절한 광고를 고객에게 제시하는데도 사용되며 이는 불법적 사용이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여기에는 기술적으로 피할 수 없는 – 예를 들어 통신을 위해서는 신호를 받아야 하고 최소한 내가 어느 지역에 있는지는 통신사가 알아야 겠지요 –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업들에게 그 정보를 합법적인 용도 외에 사용할 경우 커다란 책임을 묻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슈나이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떤 정보들은 디지털화 되어 저장되지 않는 한 그 정보를 개인 정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위치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이상, 그 누군가에게 나를 보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를 피하고 싶을 때 얼굴을 가리는 등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전원을 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개인 정보에 관한 논의는 무언가(여기서는 정보)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정의’의 문제와도 연결되며, 누가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의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물론 프라이버시의 정의도 쉽지는 않습니다. 100여 년 전 처음 등장한 프라이버시는 원래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 이 개념은 자신의 정보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슈나이어는 프라이버시를 “자신에 관한 정보가 누구에게 보여지고 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디까지가 자신에 관한 정보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자신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얼굴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이 보여지지 않을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전화를 위해 위치를 제공하는 것처럼, 안전이라는 댓가를 위해 CCTV 에 이미 이런 권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만 그런 CCTV 정보가 사용 되도록 만들어야 겠지요.

더 모호한 예를 들어보지요. 이름은 어떨까요? 언젠가, 자신의 것이지만 대부분 남들이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퀴즈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지요. 자신이 어떻게 불릴지를 결정할 권한이 자기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뉴스페퍼민트에서도 외국인의 이름을 한글로 옮길때 여러 원칙 중에 그가 자신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는가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지만 별명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름과 동일한 역할을 하며 별명 역시 본인에게 속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별명을 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매우 공허한 원칙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에 대한 생각도 사회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여 생성된 데이터에 대해 미국에서는 그 데이터가 회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유럽에서는 이를 만든 개인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페이스북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정보를 요구하는 소송이 있었고, 페이스북은 소송에서 패해 1200페이지에 달하는 PDF 파일을 그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는 오늘날 빅데이터의 시대에 우리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우리가 신경쓰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또한 정책적으로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과,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두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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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는 정보시대의 오염이고, 프라이버시 보호는 환경 보호 문제라고 말이다. 거의 모든 컴퓨터가 개인정보를 만들어낸다. 정보는 한곳에 머물면서 곪아가고 있다. 개인정보를 어덯게 처리할지, 즉 어떻게 보유하고 폐기할지가 건강한 정보 경제의 중심 과제다. 지금 우리가 초기 산업화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서둘러 산업화를 달성하려다가 환경오염을 무시해버린 조상들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것처럼, 우리의 후손들도 초기 정보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데이터 수집과 오용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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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7] “당신이 지갑을 열기전에 알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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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도 충분히 많은 돈을 가질 수 없으며, 또한 같은 돈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버드 경영 대학원의 마이클 노턴과 컬럼비아 대학의 엘리자베스 던이 쓴 <당신이 지갑을 열기전에 알아야 할 것들>은 바로 그 문제에서 출발한 책입니다. 원제가 <해피 머니: 행복한 소비의 과학>인 이 책은 돈을 어떻게 쓸 때 당신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편집장 가레스 쿡은 책이 출판된 후 저자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돈과 행복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물었습니다. 쿡은 먼저 사람들이 돈과 행복에 대해 가진 가장 큰 착각을 물었고, 마이클 노턴은 그에 대한 답으로 ‘돈이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을 꼽습니다. 그는 돈이 더 많다고 행복이 줄지는 않지만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돈을 어떻게 벌지만을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 지금 가진 돈으로 어떻게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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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실시된 전국 표본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2만 5,000달러를 벌다가 5만 달러를 벌면 삶에 대한 만족도도 두 배로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돈을 두 배로 벌면 행복도 두 배로 쌓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면, 5만 달러를 버는 사람들은 2만 5,000달러를 버는 사람보다 9퍼센트만이 삶에 더 만족해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만족하는 데 소득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한 영향을 미친다.3 미국에서 연간 7만 5,000달러를 벌어들인 사람들의 경우, 소득이 조금 더 올랐어도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 들어가며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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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소비에 있어 ‘물건’과 ‘경험’의 이분법을 제안합니다. 곧, 우리는 주로 ‘물건’을 구매하는 데 돈을 쓰지만, 대부분 같은 돈으로 ‘물건’ 보다는 ‘경험’을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값비싼 TV는 결국 홀로 TV를 보는 시간을 늘이게 되지만, 같은 돈으로 친구와 수십 번의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존재양식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행에 의해 성장한다’고 말했습니다. 물건을 소유에, 경험을 존재에 비유하는 것이 다소 무딘 단순화일 수는 있겠지만 두 주장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노턴의 대답 중 또다른 흥미로운 지적은 실제 소비와 소비에 대한 기대의 관계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 하는 시기가 실제 휴가를 갔을 때가 아니라 휴가를 가기 전 1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즉, 휴가에 대한 기대가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떤 물건을 주문하고 나서 택배가 도착한 직후까지가 실제 그 물건이 도착한 뒤 사용할 때보다 더 즐거웠던 경험을 자주 합니다.

쿡의 마지막 질문은 선물과 행복의 관계입니다. 노턴의 대답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선물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선물을 주는 사람의 행복 역시 크게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바로 ‘다음 번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같이 온 동료의 것을 한 번 주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비파크레터를 보시는 여러분은 이 충고에 커피 대신 책을 대입하면 어떨까요? 지금 생각나는 그 사람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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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 정도의 소액을 기부하더라도 여러분도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 실험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1달러가 들어 있는 봉투 한 장을 받았다. 1달러는 그냥 보관해도 되고, 자선단체에 기부해도(도너스추즈의 학교 기부활동 참여) 상관이 없었다. 혹은 연구진에게 돈을 반납해도 상관이 없었다. 누가 더 부자가 된 기분을 느꼈을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1달러를 반납했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난해진 기분을 느껴야 한다. 돈을 다 썼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1달러를 기부한 사람들이 1달러를 반납한 사람들보다 금전적 여유를 훨씬 더 많이 느꼈다. 마치 벼락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시간을 기부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쓸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듯이, 돈을 기부함으로써 돈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치라고나 할까.

– 5장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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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6] “부정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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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남태평양 군도를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왜 백인들은 이런 발전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질문을 보다 본질적인 질문으로, 곧 왜 유라시아가 아메리카보다 앞설 수 있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환경이 인류의 문명에 끼친 영향을 다층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오늘 소개할 <부정 본능> 역시 아주 멋진 질문에서 시작된 책입니다. 의학연구자인 아지트가 파고든 질문은 바로, 왜 유전적으로 거의 유사한 인간과 침팬지, 보노보가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유전자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쥐와 생쥐가 비슷한 정도 보다 인간과 침팬지가 더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P.13
서문에 나오는 이 책이 나온 과정 자체가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인도 출신의 의학연구자 아지트 바르키와 생물학자 대니 브라워는 생전 딱 한 번 만나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위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던 아지트는 한 강연장에서 강연 뒤 자신을 찾아온 대니를 만나게 됩니다. 아지트보다 두 달 먼저 미국에서 태어나 아리조나 대학의 생물학 교수로 있었던 대니는 위의 질문을 반대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왜 인류만이 이런 복잡한 정신적 능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수십억 년 전의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또한,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더 지적인 – 그 정의가 무엇이건 간에 – 개체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데 유리했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 집니다. 그러나 매우 단순한 사고실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가정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화의 핵심은 번식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 유전자가 더 많이 복제, 증식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포유류가 우연히  조금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는 다른 개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다른 개체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곧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공포에 시달릴 겁니다. 어쩌면 자살을 택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짝짓기 경쟁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적 능력은 도태되고 맙니다.
결국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부정 본능”, 곧 현실을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무의식적 능력이 위의 지적 능력과 우연히 동시에 인간에게 나타났기에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와 철학은 이런 인간의 부정 본능이 최대로 반영된 작품입니다.
실제로 인간에게 현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특성이 있다는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이 재능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까지 합니다. 낙천적인 암 환자는 비관적인 이들보다 오래 살며, 운동 선수들은 자신이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입니다.
물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데이지 유하스의 서평처럼, 이 책의 주장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디고 하며, 또한 마음이론에 대한 신경회로와, 자기기만적 경향성에 대한 신경회로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지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리 알려 드리자면 여러 과학 분야들이 그렇듯 우리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내놓겠지만, 우리가 지지하는 이론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이론에 부합하는 사실들과 개념들을 이용해 “하나의 긴 주장 one long argument”을 펼칠 것이다. 물론 과학의 전통에 따라 우리의 “아름다운 가설을 난도질 slay our beautiful hypothesis” 할지 모르는 “흉한 사실들 ugly facts”도 열심히 찾을 것이다.” -P.32
아지트는 대니와의 만남 이후 이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켰고, 몇 년 뒤 그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실망한 그는 몇 달 뒤, 우연히 대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대니가 미완성 원고를 자신의 부인에게 남겼다는 것을 들었고, 그 원고를 자신이 책으로 완성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대니의 독창적인 사상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아지트와 대니 두 사람의 흥미로운 생각에 경의를 표할 수 있었습니다.

[2016.08.03] 인류의 미래는 인간 본성에 달려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읽고

“민족, 종교, 출신 학교, 친족, 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충성에서 벗어나라.” ―버지니아 울프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읽는 동안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본성, 인문학, 외계인, 종교, 자유 의지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드는 이 책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는 ‘집단 선택설’이다. (윌슨은 이 책의 부록으로 자신의 2013년 논문을 실었다.) ‘집단 선택설’은 진화론에서 ‘포괄 적합도’ 가설과 대립하는 가설이며, 이 두 가설은 왜 생물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질문은 유전자, 혹은 개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가정한 것이며, 이 글 또한 그러하다.

‘포괄 적합도’ 가설은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형제나 사촌과 같이 유전자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집단 선택설’이란, 이타적 행위자가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을 집단 간의 경쟁에서 이겼을 것이며 따라서 이타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집단 선택설’은 일찌감치 학계에서 밀려난 반면, ‘포괄 적합도’ 가설은 수십 년간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윌슨이 81세이던 2010년에 같은 하버드 대학교의 생물학자 마틴 노왁(『초협력자』), 코리나 타르니타와 함께 ⟪사이언스⟫에 ‘집단 선택설’의 귀환을 알리는 논문을 싣자 바로 다음 해에 무려 137명의 생물학자가 ⟪네이처⟫에 이에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아직 그의 논문을 제대로 논박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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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꾼개미 © Hans Hillewaert / Wikimedia Commons

두 가설 중 어느 것이 자연 현상을 더 잘 설명하는지, 혹은 두 가설이 모두 이타적인 행동에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하는 것인지는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윌슨의 이야기에 몇 가지 매혹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갈등을 간단하게 (물론 그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하면”이라고 표현했다.) “개체 선택은 죄악을 부추긴 반면, 집단 선택은 미덕을 부추겼다.”라고 표현했다. 즉 인간이 악(이기적 행동)과 선(이타적 행동)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진화한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는 집단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가진 중요한 특징으로 “집단에 소속되려고 하는, 압도적으로 강한 본능적인 충동”을 꼽았다. 오늘날 인류 사회가 겪는 수많은 분쟁 중에 바로 이런 충동에 의지하는 불필요한 다툼이 얼마나 많을까? 이 지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떠올렸다. 벤처 투자자 폴 그레이엄의 글 「자신의 정체성 최소화하기」(http://paulgraham.com/identity.html)도 연상된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프랑수아 뒤부아 / public domain

『인간 존재의 의미』에서 흥미롭게 읽은 또 다른 부분은 외계의 생물에 대한 윌슨의 추정이다. 최근 외계 생물의 존재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여러 발견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항성은 행성을 가졌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그중 약 5분의 1은 생명체가 거주 가능한 거리에 행성을 가지고 있다. 윌슨은 여기에 자신의 지식을 몇 가지 더한다. 우선 지구의 경우에는 생명체가 살기에 바람직한 조건이 되자마자 미생물이 나타났다고 한다. 곧 지구가 만들어진 것은 45억 4000만 년 전이며, 그로부터 1~2억 년 사이에 미생물이 출현했다.

또한 심해의 화산 분출구와 같이 끓는 점보다 높은 온도의 물에서도 미생물은 살고 있으며 pH가 황산에 가까운 광산 유출수에도 미생물이 산다. 지구에서 가장 생명체가 살기 힘든 환경일 남극 대륙에도 미생물은 우글거린다. 따라서 그는 화성의 초기 바다에서 진화한 생물이 깊은 지하의 수중에 살고 있을 가능성과, 토성이나 목성의 달 표면, 두꺼운 얼음 아래의 수중에 생물이 살 가능성을 말한다.

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물리학과 생물학 지식을 통해서 어쩌면 있을지 모르는 지성을 가진 외계 생물의 모습을 추정한다. 우주는 물질과 전자기파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그들 역시 인간처럼 물질의 진동을 감지하는 청각과 전자기파를 감지하는 시각을 주요한 감각 및 의사소통 수단으로 가질 것이다. (월슨은 텔레파시는 간단히 무시한다.) 불은 매우 유용한 도구이자 에너지원이며 따라서 외계인은 수중이 아닌 육상 생물일 것이다. 외계인의 머리는 인간처럼 몸에 비해 클 것이며 지구상의 거의 모든 육상 동물처럼 감각 기관은 전면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피나클 사막의 은하수 © 황인준,  『별빛 방랑』

내가 소속된 회사는 빅데이터와 인공 지능을 의료 분야에 적용하는 일을 한다. (나는 뇌졸중 재활 환자를 분류해 각자 최적의 훈련을 제시하는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개인화(personalisation)’는 이 분야에서 핵심적인 키워드 중의 하나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강조한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에 대응된다. 인간은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지식의 한계 탓에 유사한 증상에도 동일한 처방을 내려야만 했다. 이제는 지식의 축적, 특히 기계 학습을 통한 빅데이터의 해석 등을 통해 유전자와 미생물총(micro biome) 등, 개인이 가진 특성에 맞는 치료를 지향하게 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분야와 상관 없이 이론에서 예측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충분한 지식이 쌓였을 때 우리는 외계의 생물 역시 그 환경의 정보에 맞추어 예측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화론과 생물학, 우주론이 적절히 결합할 경우, 언젠가 우리는 천문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어떤 행성의 외적 조건, 곧 그 행성의 크기, 나이, 대륙과 해양의 형태, 과거 및 현재의 기후, 대기와 지상의 주요 구성 성분 등의 정보만으로도 그 행성에 언제 생물체가 탄생했으며 현재 어떤 생명체들이 생존 중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가 지닌 지식은 지구와 비슷한 환경에서 생명체들이 탄생했다는 하나의 예 뿐이며, 위와 같은 예측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더욱 잘 알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2016.07.19]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판다의 엄지』를 읽고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나 역시 국내의 많은 다른 이들처럼(아마도) 굴드보다 리처드 도킨스를 먼저 알았다. 1997년, 도서관 4층에서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저 특이한 제목이라 생각하며 책장에서 뽑아 읽었던 『이기적 유전자』는 나를 그 책을 읽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일 이후로 데니얼 데닛이나 스티븐 핑커, 마이클 셔머 등을 읽게 됐다. 굴드를 처음 접한 계기 역시 도킨스의 책(『악마의 사도』에는 절반의 상찬과 절반의 비판으로 이루어진, 굴드의 책에 대한 서평과 그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한 챕터를 이루고 있다)이었고, 실제로 굴드의 책을 읽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굴드는 도킨스와 다르다. 도킨스가 명쾌하고 시원하다면 굴드는 보다 불확실하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도킨스가 때로 가볍고 불안하다면, 굴드는 진중하고 침착하다. 이런 차이는 두 사람의 과학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도킨스가 자신이 과학이라는 진리의 편에 서 있고 따라서 때로 상대를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자세를 보이는 듯하다면, 굴드는 과학은 사회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과학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늘 강조하는 이처럼 보인다. 이런 배경에는 보다 깊은 과학사적 흐름이 존재하리라 생각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를 설명할 만한 지식까지는 지니지 못했다. 단지 굴드는 그가 관련된 모든 논쟁에서 결국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라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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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등장한 장면. 그는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굴드와 도킨스의 여러 논쟁 중,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한 마디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물론 이 단순한 주장에는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허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진보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당장 도킨스 역시 ‘적응론적’ 진보에 대해 이야기하며 ‘적응 적합성을 누적적으로 개선하는’, 곧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을 진보의 정의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 진화는 거의 연역적으로 진보를 낳는다.

그러나 굴드가 이런 반론을 몰라서 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진화라는 단어 자체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곧 “더 고등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연상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실제 자연과 진화의 모습(그의 표현을 빌면, “방향성 없는 방랑(undirected wandering)”)과 다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택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진, 인간이 모든 생명체 중 가장 고등한 존재이며 진화의 사디리 꼭대기에 위치한다는 생각에 일침(그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에 가깝다는)을 가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21세기의 황금률이다. 곧 굴드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아치 위의 삼각형 공간인 스팬드럴을 장식한 부조. ©Thesupermat

적응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은, 리처드 르원틴과 함께 쓴 스팬드럴(Spandrel)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식상한 설명이겠지만, 스팬드럴은 중세 건물의 지붕을 세울 때 아치를 올리고 남은 옆 공간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말로 된 설명만으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스팬드럴을 언급하는 글에는 대부분 사진이 따라 붙는다.)

스팬드럴은 지붕을 올리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그 자체로 미적 가치를 가진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그가 하고자 한 말은, 생물의 형태, 구조, 기능이 언제나 적응, 곧 특정한 목적을 위해 진화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은 누구도 “모든 것을 적응으로 설명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면서, 곧 굴드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어떤 구조나 기능에 대해 이를 적응으로 설명하려는 유혹을 느꼈을 것이며, 특히 ‘그냥 이야기(just so stories)’라는 비아냥을 종종 듣는 진화 심리학에 대해 이 비판은 더욱 유효하다. 그는 이 주장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기 쉬운 유혹에 경고를 보내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굴드의 또 다른 저서인 『인간에 대한 오해』와, 지능과 관련한 논쟁 등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그의 경고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인간이 가진 얼핏 눈에 보이는 차이들이, 어떤 물리적, 객관적 실체에 기반을 두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세상은 간단하지 않으며, 또한 그런 유혹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한다. (이 부분은 사회적, 아니 정치적으로 다소 복잡한 문제로서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등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공룡 화석 앞에 선 스티븐 제이 굴드. 그는 단속평형설을 주창함으로써 진화론에 대한 오랜 반론 중 하나였던 “잃어버린 고리”의 문제를 설명해 냈다.

이러한 주장들에 비하면 굴드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단속 평형설(이 이론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진화의 패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만)은 오히려 다양한 의미에서 흥미롭다. 여기서 “단속 평형”이란 영어로 punctuated equilibria를 의미하며, 평형 상태(equilibria)가 끊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곧 생물의 진화에 있어 긴 기간의 평형 상태, 곧 생물의 진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이어지다가, 어느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짧은(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긴) 시간 동안 급격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당시의 상식이었던 단순한 점진적 진화(진화가 서서히 이루어졌다는 이론)에 대해, 이 경우에는 고생물학(화석 증거)을 바탕으로 반박하는 이론을 내놓은 것이다.

특히 단속평형설은 진화론이 답해야 했던 중요한 질문에 해답을 제공한다.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 불리는, 중간 단계의 화석이 드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나 짧은 시기를 단속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문제부터 같은 맥락에서 기존의 점진적 진화 역시 완벽하게 고른 속도의 진화를 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까지(특히 급격한 환경의 변화와 같은 외부 요인이 존재할 때) 이것을 새로운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판다의 엄지』 표지.

물론 이 모든 굴드의 특징만큼이나 빠뜨릴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의 타고난 글솜씨일 것이다. 사이언스북스에서 새로 출간된 『판다의 엄지』를 들자마자 순식간에 첫 챕터를 읽고 말았다. 굴드는 판다가 앞발을 이용해 아주 능숙하게 대나무 줄기를 잡고 잎을 뜯어낸 후 새순을 먹는 장면을 보고 놀란다(이 장면을 상상하며 우리가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보너스다). 그리고 판다가 이 동작을 위해 엄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는 다른 손가락과 마주보는 엄지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바로 인간은 손의 기능을 계속 향상시켰지만 다른 포유류들은 달리기 등을 위해 이것을 희생시켰다.

그는 판다의 손가락을 세보고 다시 놀란다. 판다는 엄지를 제외하고도 5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한편 나는 글 중에 놀랐다거나 당황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시키는 기술임을 배웠다.) 판다의 엄지에 감춰진 비밀은 이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아니, 이야기를 꺼냈으니 마저 답을 말해 주겠다. 사실 판다의 엄지는 사실은 손목을 이루는 작은 뼈가 커지고 자연스럽게 근육이 붙은 것이었다. (앞발의 이러한 변화 때문에 뒷발에도 불필요한 엄지가 자라났다는 사실 역시 굴드는 언급한다.) 이 판다 이야기 이외에도 수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 가득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독자는 내가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교훈을 굴드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016.07.05] 3200만년 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건 물리학자들뿐

「이효석의 과학 페퍼민트」 첫 번째 이야기

사이언스북스에서는 외신 큐레이션 서비스의 대표 주자 뉴스페퍼민트와 콜라보레이션을 시작합니다. 2016년 7월부터 매주 뉴스페퍼민트와 사이언스북스의 블로그에서 뉴스페퍼민트가 엄선한 최신 과학 정보를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격주로 사이언스북스의 블로그에서 뉴스페퍼민트 대표 이효석 박사님의 「이효석의 과학 페퍼민트」를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톡톡 튀는 과학 기술 관련 통찰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이효석의 과학 페퍼민트」 첫 번째 이야기는 얼마 전 신간 『암흑 물질과 공룡』과 함께 우리나라를 찾은 리사 랜들 이야기입니다.

미래를 진정 예측할 수 있는 건 물리학자들뿐

리사 랜들의 『암흑 물질과 공룡』에 부쳐

리사 랜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99년이다. 당시 입자 물리 연구실과 같은 방을 쓰던 나는 연구실의 모든 대학원생들이 어느날부터인가 랜들-선드럼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랜들-선드럼이 한 사람의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이 이름이 리사 랜들과 라만 선드럼,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이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은 여성 물리학자가 모든 학문의 꽃인 그리고 물리학 안에서도 가장 심오하고 철학적인 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론을 내놓은 것이다.

그들이 쓴 두 편의 논문은 RS-1과 RS-2로 불리며 1만 번 이상의 인용을 기록했고 두 사람은 슈퍼스타가 되었다. 당시 랜들의 제안으로 공동 연구를 하게 된 선드럼은 보스턴 대학교에서 세 번째 포닥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다음 자리를 찾지 못해 금융권으로의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논문은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선드럼은 그 논문 이후 일곱 군데 대학에서 자리를 제안받았고 지금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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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이론은 물리학계의 가장 유명한 숙제와 연관된다. 그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단 네 가지 기본 힘인 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하나의 이론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목표이며, 특히 아인슈타인이 인생의 후반기 30년을 고민한 문제로 더욱 유명하다. 중력을 제외한 세 힘은 여러 물리학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 잡았지만 중력은 다른 세 힘과 매우 다르며, 특히 그 크기가 10의 16제곱만큼 작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기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대폭발(big bang) 초기의 순간에는 이 네 가지 힘이 하나의 힘이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으며, 왜 중력만이 다른 힘들과 다른 에너지 스케일을 가지는가 하는 소위 계층성 문제(Hierarchy Problem)은 지속적으로 물리학자들을 괴롭혀 왔다. 랜들과 선드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그들은 추가적인 차원을 도입하되 그 차원이 주기적으로 말려 있기 때문에 단지 우리의 실제 세계에서는 인지되지 않을 정도록 작다는 가정을 세웠다. 곧, 중력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3차원 공간이 아닌, 10의 -31제곱으로 접힌 다른 하나의 차원에 주로 존재하며 그 공간에서는 다른 세 힘에 비해 훨씬 강한 힘이지만, 현실의 3차원에서는 다른 세 힘보다 약하게 존재한다는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론은 21세기 입자 물리학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이 되었다.

랜들의 학문적 호기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입자 물리학 분야 내부에서도 테크니칼라 모델, CP 대칭성 깨짐 현상, 플레버 구조, 중입자 생성 문제 등의 다양한 문제에 흥미로운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녀는 대중들에게 이를 설명하는 재주 또한 지니고 있어 2005년 처음 저술한 대중서인 『숨겨진 우주』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녀는 이 책을 읽고 찾아온 작곡가와 함께 2010년 오페라의 대본을 쓰기도 한다. 2011년 후속작으로 출판한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에서 그녀는 최첨단 현대 물리학이 어떻게 진리를 발견해 나가고 있는지를 묘사한다.

랜들의 새 책 『암흑 물질과 공룡』은 그녀의 다양한 관심사가 자신의 물리적 직관, 특히 가장 작은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가장 큰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된 현대 우주론의 매력과 만나 탄생한 역작이다. 또한 이질적인 두 분야, 곧 우주론과 고생물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개념인 ‘암흑 물질’과 ‘공룡’을 연결시켜, 그 이야기를 그럴듯할 뿐 아니라 매우 흥미로운 과학적 과설로 풀어낸 것은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현대 우주론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가 우리가 사는 이 우주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중력에만 영향을 받으며 전자기력과는 상호작용 하지 않기 때문에, 곧 빛과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직접 볼 수 없다. 단지 중력 렌즈, 곧 중력에 의해 빛이 휘어지는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를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암흑 물질은 우주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몸을 통과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랜들의 가설은 간단히 말하면, 암흑 물질에 의해 공룡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가정들을 세워 이 가설을 뒷밤침한다. 우선 우리 은하에 분포하는 암흑 물질은 얇은 원반 형태로 우리 은하에 분포한다. 그리고 우리 태양계는 은하 주위를 상하로 진동하며 돌고 있으며, 따라서 태양계는 주기적으로 암흑 물질과 충돌하게 된다.

한편, 랜들은 암흑 물질이 하나의 입자가 아니라 다양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일부는 물질과 상호 작용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그녀의 매우 흥미로운 가정이다. 사실 암흑 물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며, 그녀 역시 이 비밀이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가장 신비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암흑 물질이 한 종류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 가정한 데 비해, 암흑 물질이 다양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일부만이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아직까지 우리가 암흑 물질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 역시 설명한다.

또한 태양계를 구성하는 가장 바깥에는 오르트 구름이라는 혜성들의 구름이 있다. 따라서 태양계가 암흑 물질의 원반과 충돌할 때, 이 오르트 구름의 소행성 중 일부가 태양계 내부로 들어와 태양을 향하게 되며 우리는 이들을 혜성이라고 부른다. 랜들이 제안하는 가설의 핵심은 바로 그 혜성 중 일부가 태양계의 행성들과 충돌하며, 그중 한 혜성이 공룡을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공룡을 멸망시킨 혜성을 포함한 지구상에 떨어졌던 유성체들의 연대기를 작성했고, 그 결과 3500만 년을 주기로 유성체들이 다수 쏟아졌음을 발견했다. 곧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에 얇게 퍼진 암흑 물질의 원반과 3500만 년마다 한 번씩 충돌한다는 것이다.

『암흑 물질과 공룡』은 랜들이 앞서 내놓은 책들과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르다. 지금까지 그녀가 쓴 책들이 학계에서 인정된, 곧 사실에 가까운 보다 확립된 지식을 설명했다면, 이번 책은 가설에 가까우며 물론 그 때문에 더욱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녀의 가설에 따르면, 앞으로 3200만 년 뒤 지구는 대규모의 별똥별 세례를 겪을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모든 지적 생명체의 본성이다. 2016년 우리는 알파고가 가져다 준 충격을 겪으며 수십 년 뒤 다가올 인공지능에 의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수십 년 뒤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3200만 년 뒤의 미래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 정도 스케일로 지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이들이란 오직 물리학자들뿐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참조 기사

뉴욕 타임스 [기사보기]

가디언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