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9] “스포츠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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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엡스타인의 책 “스포츠 유전자(The Sports Gene)”는 스포츠 분야에서 유전자와 환경, 곧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효과를 다룬 책입니다. 물론 오늘날 본성과 양육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승리를 말하기 어려운 개념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동등할 때 누구나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빈 서판’이론의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키와 체형과 같은 육체적 특징 뿐 아니라 정신적 특징 또한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알려지고 있는 후성 유전자는 환경이 어떻게 다시 유전자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지와 함께 이 두 요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말해 줍니다. 엡스타인 또한 이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사실 운동능력을 전적으로 본성이나 양육 어느 한쪽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는 모두 허수아비 논법일 뿐이다. 전 세계의 모든 운동선수들이 일란성 쌍둥이라면, 누가 올림픽에 나가고 직업 선수가 될지는 오로지 환경과 연습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반대로 전 세계의 모든 운동선수가 똑같은 방식으로 훈련 받는다면, 오로지 유전자에 따라 경기력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양쪽 시나리오는 둘 다 들어맞지 않는다.” – P.401

하지만 적어도 운동능력에 있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예들은, 비록 두 요인이 모두 중요하다 하더라도 유전적 요인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수많은 실제 예들이 등장한다는 것인데, 바로 위의 표현 다음에도 이런 예를 말해 줍니다. 곧, 일란성 쌍둥이지만 서로 다르게 훈련을 받은 미국의 멜리사 바버와 미켈레 바버는 100미터 최고 기록이 겨우 0.07초 차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 책은 시작부터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주장해 유명해진 ‘1만 시간의 법칙’을 반박합니다. 오늘날 ‘1만 시간의 법칙’은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육’진영의 사람들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누구나 1만 시간을 훈련하면 그 분야의 정상에 설 수 있다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2004년 올림픽 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스웨덴의 스테판 홀름은 6살때 높이뛰기를 시작했으며 금메달을 따기까지 20,000 시간의 훈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2007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스네판 홀름을 물리치고 우승한 선수는 높이뛰기를 시작한지 겨우 8개월 된 바하마의 도날드 토마스였습니다.

이 책의 곳곳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왜 20세기 동안 세계 기록은 끝없이 경신되었고 최근 그 추세가 주춤해진 것일까요? 일부는 해당 종목을 둘러싼 기술의 발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1930년대 전설적인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의 동영상을 생체 역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칼 루이스의 관절만큼 빨리 움직였다고 합니다. 단지 오언스는 후에 발명된 합성수지 트랙보다 훨씬 달리기 힘든 트랙을 달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엡스타인이 말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체형의 빅뱅”이라는 것으로,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평균적인 체형을 가진 이들이 스포츠에 참여했지만, 20세기 동안 스포츠 우승자들에 대한 보상이 커지면서 각 종목에 최적화된 체형을 가진 이들이 각 종목을 석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925년에는 배구선수와 원반 던지기 선수, 높이 뛰기 선수의 몸집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투포환 선수는 높이뛰기 선수보다 평균 6.4 cm 크고, 59 킬로그램이 더 무겁습니다. 체조선수의 키는 160cm 에서 145cm 로 줄었지만 대다수의 스포츠 종목에서 선수들의 키는 계속 커졌습니다. NFL 에서는 키 1cm 와 몸무게 3kg 마다 연봉이 5천만원씩 올라갑니다.

키와 몸무게만이 아니라 신체 구조에도 종목별로 최적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수구 선수들은 팔이 길어졌고, 특히 효율적인 던지기를 위해 아래 팔이 위 팔보다 더 길어졌습니다. 카누와 카약 선수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반면, 역도 선수들은 쉽게 머리 위로 바벨을 들기 위해 팔이 짧아졌고, 특히 아래 팔이 더 짧아 졌습니다. 농구와 배구 같이 점프가 필요한 종목의 선수들은 다리가 길어졌지만 권투 선수들은 무게 중심을 낮춰 안정된 자세로 팔을 뻗기 위해 팔은 길어지고 다리는 짧아졌습니다.

즉 기록의 경신은 이러한 체형의 변화에서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1500미터 달리기가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매 10년마다 8번 정도 경신되었지만, 2000년 이후로는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은 곧 이런 기록 경신의 시대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물론 우사인 볼트의 예외가 있고, 저자는 우사인 볼트의 성공이 다른 종목에서 큰 키와 폭발력을 갖춘 이들이 단거리 육상으로 종목을 바꿀지가 흥미롭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에 나오는 작은 일화들 하나하나에서 (예를 들어 NBA 에서 스타로 활약했던 야오 밍은 중국 정부가 중매를 서서 맺어진, 전직 남녀 농구 선수인 중국 최장신 부부의 아들이라는군요) 즐거움을 느낄 겁니다.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 그리고 최신 연구결과들이 궁금한 사람들도 물론이며, 인간의 한계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추천합니다.

[2016.10.25]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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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과거 CIA 와 NSA 에서 일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가디언을 통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와 영국의 정보기관이 자국의 시민들 뿐 아니라 전세계의 통화기록 및 인터넷 사용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 사찰하고 있음을 폭로했습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이 사건에 대한 여러 언론의 보도를 실었고, 스노든에 관한 책을 쓰던 한 저자가 겪은 일도 소개했습니다. http://newspeppermint.com/2014/02/24/snowden/ “스노든 파일”을 쓴 루크 하딩에 따르면 가디언에 스노든 기사가 올라온 직후, 가디언의 뉴욕 사무실과 워싱턴 사무실 앞 보도블럭 교체공사가 동시에 시작되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노든 사건은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세계 최고의 보안 전문가”라 불리는 브루스 슈나이어의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남기는 데이터들을 기업과 정부가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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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을 때마다 당신은 이동 통신사와 암묵적인 거래를 하고 있다. “전화를 걸고 싶습니다. 대신 당신네 회사가 나의 위치를 항상 알 수 있게 해주지요.” 그 내용은 어떤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비스의 작동방식에 내재해 있다. … 이는 아주 은밀한 형태의 감시이다. 당신의 휴대폰은 당신이 사는 곳, 당신이 일하는 곳을 추적한다.그리고 주말과 저녁을 주로 어디서 보내는지, 얼마나 자주 교회에 가는지(그리고 어느 교회에 가는지), 술집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그리고 운전할 때 속도를 내는지 추적한다. 또 당신이 위치한 지역 내의 다른 모든 전화에 관해서도 알고 있으므로 당신이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지, 점심 때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와 자는지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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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화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스마트폰에 들어온 서비스 중에 우리의 위치를 요구하는 서비스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지도와 네비게이션이 위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사진 앱은 내가 사진을 찍은 곳을 기록하기 위해 이를 요구합니다. 배달 서비스와 음식점 추천 앱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위치 정보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수집한 위치 정보는 원래의 목적 이외에 적절한 광고를 고객에게 제시하는데도 사용되며 이는 불법적 사용이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여기에는 기술적으로 피할 수 없는 – 예를 들어 통신을 위해서는 신호를 받아야 하고 최소한 내가 어느 지역에 있는지는 통신사가 알아야 겠지요 –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업들에게 그 정보를 합법적인 용도 외에 사용할 경우 커다란 책임을 묻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슈나이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떤 정보들은 디지털화 되어 저장되지 않는 한 그 정보를 개인 정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위치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이상, 그 누군가에게 나를 보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를 피하고 싶을 때 얼굴을 가리는 등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전원을 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개인 정보에 관한 논의는 무언가(여기서는 정보)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정의’의 문제와도 연결되며, 누가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의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물론 프라이버시의 정의도 쉽지는 않습니다. 100여 년 전 처음 등장한 프라이버시는 원래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 이 개념은 자신의 정보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슈나이어는 프라이버시를 “자신에 관한 정보가 누구에게 보여지고 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디까지가 자신에 관한 정보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자신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얼굴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이 보여지지 않을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전화를 위해 위치를 제공하는 것처럼, 안전이라는 댓가를 위해 CCTV 에 이미 이런 권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만 그런 CCTV 정보가 사용 되도록 만들어야 겠지요.

더 모호한 예를 들어보지요. 이름은 어떨까요? 언젠가, 자신의 것이지만 대부분 남들이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퀴즈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지요. 자신이 어떻게 불릴지를 결정할 권한이 자기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뉴스페퍼민트에서도 외국인의 이름을 한글로 옮길때 여러 원칙 중에 그가 자신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는가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지만 별명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름과 동일한 역할을 하며 별명 역시 본인에게 속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별명을 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매우 공허한 원칙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에 대한 생각도 사회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여 생성된 데이터에 대해 미국에서는 그 데이터가 회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유럽에서는 이를 만든 개인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페이스북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정보를 요구하는 소송이 있었고, 페이스북은 소송에서 패해 1200페이지에 달하는 PDF 파일을 그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는 오늘날 빅데이터의 시대에 우리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우리가 신경쓰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또한 정책적으로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과,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두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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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는 정보시대의 오염이고, 프라이버시 보호는 환경 보호 문제라고 말이다. 거의 모든 컴퓨터가 개인정보를 만들어낸다. 정보는 한곳에 머물면서 곪아가고 있다. 개인정보를 어덯게 처리할지, 즉 어떻게 보유하고 폐기할지가 건강한 정보 경제의 중심 과제다. 지금 우리가 초기 산업화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서둘러 산업화를 달성하려다가 환경오염을 무시해버린 조상들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것처럼, 우리의 후손들도 초기 정보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데이터 수집과 오용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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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7] “당신이 지갑을 열기전에 알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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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도 충분히 많은 돈을 가질 수 없으며, 또한 같은 돈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버드 경영 대학원의 마이클 노턴과 컬럼비아 대학의 엘리자베스 던이 쓴 <당신이 지갑을 열기전에 알아야 할 것들>은 바로 그 문제에서 출발한 책입니다. 원제가 <해피 머니: 행복한 소비의 과학>인 이 책은 돈을 어떻게 쓸 때 당신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편집장 가레스 쿡은 책이 출판된 후 저자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돈과 행복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물었습니다. 쿡은 먼저 사람들이 돈과 행복에 대해 가진 가장 큰 착각을 물었고, 마이클 노턴은 그에 대한 답으로 ‘돈이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을 꼽습니다. 그는 돈이 더 많다고 행복이 줄지는 않지만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돈을 어떻게 벌지만을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 지금 가진 돈으로 어떻게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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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실시된 전국 표본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2만 5,000달러를 벌다가 5만 달러를 벌면 삶에 대한 만족도도 두 배로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돈을 두 배로 벌면 행복도 두 배로 쌓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면, 5만 달러를 버는 사람들은 2만 5,000달러를 버는 사람보다 9퍼센트만이 삶에 더 만족해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만족하는 데 소득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한 영향을 미친다.3 미국에서 연간 7만 5,000달러를 벌어들인 사람들의 경우, 소득이 조금 더 올랐어도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 들어가며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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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소비에 있어 ‘물건’과 ‘경험’의 이분법을 제안합니다. 곧, 우리는 주로 ‘물건’을 구매하는 데 돈을 쓰지만, 대부분 같은 돈으로 ‘물건’ 보다는 ‘경험’을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값비싼 TV는 결국 홀로 TV를 보는 시간을 늘이게 되지만, 같은 돈으로 친구와 수십 번의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존재양식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행에 의해 성장한다’고 말했습니다. 물건을 소유에, 경험을 존재에 비유하는 것이 다소 무딘 단순화일 수는 있겠지만 두 주장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노턴의 대답 중 또다른 흥미로운 지적은 실제 소비와 소비에 대한 기대의 관계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 하는 시기가 실제 휴가를 갔을 때가 아니라 휴가를 가기 전 1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즉, 휴가에 대한 기대가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떤 물건을 주문하고 나서 택배가 도착한 직후까지가 실제 그 물건이 도착한 뒤 사용할 때보다 더 즐거웠던 경험을 자주 합니다.

쿡의 마지막 질문은 선물과 행복의 관계입니다. 노턴의 대답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선물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선물을 주는 사람의 행복 역시 크게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바로 ‘다음 번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같이 온 동료의 것을 한 번 주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비파크레터를 보시는 여러분은 이 충고에 커피 대신 책을 대입하면 어떨까요? 지금 생각나는 그 사람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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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 정도의 소액을 기부하더라도 여러분도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 실험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1달러가 들어 있는 봉투 한 장을 받았다. 1달러는 그냥 보관해도 되고, 자선단체에 기부해도(도너스추즈의 학교 기부활동 참여) 상관이 없었다. 혹은 연구진에게 돈을 반납해도 상관이 없었다. 누가 더 부자가 된 기분을 느꼈을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1달러를 반납했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난해진 기분을 느껴야 한다. 돈을 다 썼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1달러를 기부한 사람들이 1달러를 반납한 사람들보다 금전적 여유를 훨씬 더 많이 느꼈다. 마치 벼락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시간을 기부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쓸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듯이, 돈을 기부함으로써 돈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치라고나 할까.

– 5장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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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6] “부정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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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남태평양 군도를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왜 백인들은 이런 발전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질문을 보다 본질적인 질문으로, 곧 왜 유라시아가 아메리카보다 앞설 수 있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환경이 인류의 문명에 끼친 영향을 다층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오늘 소개할 <부정 본능> 역시 아주 멋진 질문에서 시작된 책입니다. 의학연구자인 아지트가 파고든 질문은 바로, 왜 유전적으로 거의 유사한 인간과 침팬지, 보노보가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유전자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쥐와 생쥐가 비슷한 정도 보다 인간과 침팬지가 더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P.13
서문에 나오는 이 책이 나온 과정 자체가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인도 출신의 의학연구자 아지트 바르키와 생물학자 대니 브라워는 생전 딱 한 번 만나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위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던 아지트는 한 강연장에서 강연 뒤 자신을 찾아온 대니를 만나게 됩니다. 아지트보다 두 달 먼저 미국에서 태어나 아리조나 대학의 생물학 교수로 있었던 대니는 위의 질문을 반대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왜 인류만이 이런 복잡한 정신적 능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수십억 년 전의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또한,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더 지적인 – 그 정의가 무엇이건 간에 – 개체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데 유리했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 집니다. 그러나 매우 단순한 사고실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가정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화의 핵심은 번식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 유전자가 더 많이 복제, 증식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포유류가 우연히  조금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는 다른 개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다른 개체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곧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공포에 시달릴 겁니다. 어쩌면 자살을 택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짝짓기 경쟁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적 능력은 도태되고 맙니다.
결국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부정 본능”, 곧 현실을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무의식적 능력이 위의 지적 능력과 우연히 동시에 인간에게 나타났기에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와 철학은 이런 인간의 부정 본능이 최대로 반영된 작품입니다.
실제로 인간에게 현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특성이 있다는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이 재능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까지 합니다. 낙천적인 암 환자는 비관적인 이들보다 오래 살며, 운동 선수들은 자신이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입니다.
물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데이지 유하스의 서평처럼, 이 책의 주장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디고 하며, 또한 마음이론에 대한 신경회로와, 자기기만적 경향성에 대한 신경회로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지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리 알려 드리자면 여러 과학 분야들이 그렇듯 우리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내놓겠지만, 우리가 지지하는 이론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이론에 부합하는 사실들과 개념들을 이용해 “하나의 긴 주장 one long argument”을 펼칠 것이다. 물론 과학의 전통에 따라 우리의 “아름다운 가설을 난도질 slay our beautiful hypothesis” 할지 모르는 “흉한 사실들 ugly facts”도 열심히 찾을 것이다.” -P.32
아지트는 대니와의 만남 이후 이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켰고, 몇 년 뒤 그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실망한 그는 몇 달 뒤, 우연히 대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대니가 미완성 원고를 자신의 부인에게 남겼다는 것을 들었고, 그 원고를 자신이 책으로 완성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대니의 독창적인 사상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는 아지트와 대니 두 사람의 흥미로운 생각에 경의를 표할 수 있었습니다.

[2016.07.19] “쌤통의 심리학”

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심리가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이런 감정 나타내는 단어까지 있지요. 바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을 나타냅니다. 현암사가 2015년 12월 출간한 “쌤통의 심리학(The Joy of Pain)”은 바로 이 감정에 관한 책입니다. 저자 리차드 스미스 박사는 이 감정의 전문가입니다. 그의 전작은 샤덴프로이데의 사촌 격인 질투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스미스 박사는 이 책에서 샤덴프로이데가 비록 비뚤어진 감정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감정이 사회적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기 위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자 하는 ‘사회적 비교’ 습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원숭이와 개 역시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이 습성이 우리 내부의 매우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증거라고 그는 말해줍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서평은 작가 쉐릴 스트레이드의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받고,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는 말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보다 더 선택받고, 사랑받고, 존중받는 누군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추락하기를 바라며 이것이 바로 샤덴프로이트의 원인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미스 박사가 드는 예에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브누아 모닌은 바로 이 감정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채식주의자는 그 존재만으로 그렇지 않은 이들을 도덕적으로 주눅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였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채식주의자들은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위협을 느낍니다.” 채식주의자들의 위선이 밝혀질 때 다른 사람들이 느낀 위협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따라서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반대로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샤덴프로이데가 일상에서 보다 쉽게 드러나는 예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유명인의 추락을 즐길 때입니다. 스미스 박사는 타블로이드 잡지가 바로 그런 샤덴프로이데가 작동하는 예로 듭니다. 대표적인 타블로이드 잡지인 내셔널 인콰이어러지를 분석한 결과, 유명인의 지위가 높을 수록 그들에 관한 기사는 그들의 불행에 관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스미스 박사는 결론으로 샤덴프로이데를 “사악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우리의 어두운 면을 즐겁게 해주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수동적인 방관자의 관점에서 이것을 즐기는 한, 샤덴프로이데는 우리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도 우리와 같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스미스 박사가 예로 드는 것은 마사 스튜어트의 곤경이나 타이거 우즈의 몰락과 같이 미국의 예이지만, 저는 이 샤덴프로이데가 우리나라에 더욱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연예인의 무지나 추문에 유독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는 데에는 이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이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스미스 박사의 말처럼 이 감정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피상적인 평등이 확장될수록 샤덴프로이데에 기반한 사회적 동요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잘못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실제적인 사회적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 그저 진화적으로 장착된 감정의 소모로 끝나고 마는 것일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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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아이돌〉은 출연자의 굴욕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한 예에 불과하다. 미디어 학자인 앰버 와츠의 분석에 따르면, 출연자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러 장치들로 시청자를 유혹하는 리얼리티 포맷의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났다. 텔레비전을 많이 보지 않는 사람일수록 분명히 느끼겠지만,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나온다. 또 다른 미디어 학자인 세라 부커와 브래드 웨이트는 각본 있는 드라마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자들의 굴욕적인 모습이 더 많이 나온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은 이런 경향에 ‘휴밀리테인먼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69

[2016.06.14] 그레이엄 그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영국 타임즈 지에서 매주 발행하는 타임즈 문예 부록(Times Literary Supplement)의 보도국장을 맡고 있는 제임스 맥마누스는 얼마 전 허핑턴 포스트에 “그레이엄 그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실었습니다. 그 글은 당대에 이름을 얻었다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져가는 작가들에 대한 글입니다. 그는 그 글의 시작에서 자신이 20세기 가장 유명한 소설가 중 한 명이라 생각하는 ‘그레이엄 그린’을 젊은 동료들이 모른다는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중반 활약한 영국의 작가로 24편의 장편과 수많은 단편, 수필, 희곡을 썼고 여러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영화 “제 3의 사나이”, “하바나의 남자”, 그리고 랠프 파인즈가 주연한 최근 영화인 “애수(The End of the Affair)”는 모두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대표작 “권력과 영광”에 나온 “분노는 상상력의 부족이다(Hatred is a failure of imagination)” 라는 격언으로도 유명합니다. 몇 년 전,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 처조카들이 방학기간 동안 놀러 온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그중 한 아이가 제게 이모부는 왜 운전 중에 험한 말을 하지 않는지 묻더군요. 그때 저는 그린의 저 격언을 알려주며, 이모부는 누군가가 새치기를 하거나 갓길로 달리거나, 또는 무리하게 끼어드는 것을 볼 때, 그 차 안에 임산부가 있거나 비행기 시간이 아슬아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화장실이 아주 급한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지요.

제임스의 칼럼으로 다시 돌아와, 그는 왜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팔리는 데 반해 그레이엄 그린은 그렇지 못한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알기 위해 타임즈 지의 인기 문학 편집자 에리카 와그너(Erica Wagner)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에리카가 제임스에게 해 준 답변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그린이 지금 “무인지대(no-man’s land)”*로 들어갔으며, 한 시대의 모든 인기작가는 헤밍웨이나 디킨즈와 같은 불멸의 거장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이 무인지대를 거쳐야만 할 뿐 아니라 그 중 대부분의 작가와 작품은 영원히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과 함께, 그녀가 덧붙인 이야기는 제임스의 말문을 닫게 했습니다. 곧, 그녀는 1995년 세상을 떠난 이래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 캐나다의 뛰어난 소설가 로버트슨 데이비스를 자신이 열심히 띄우고 있다고 말했고, 제임스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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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먼저, 사람들이 가진 관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또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건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 큰 가치를 둘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대에 인기작가로 올라선 이들이라 하더라도 다시 시대를 넘어 고전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경쟁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 있겠지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으로 올라간 작품이 과연 그 작품이 가진 본연의 가치 때문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오늘날, 어떤 작품이 당대의 인기를 끌게 되는 데에는 그 작품을 둘러싼 사회의 영향, 혹은 운이라 불릴 수 있는 보다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다단한 요소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고전으로 남게되는 작품 역시 비록 그 정도는 약하다 할지언정 어느 정도는 그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50년만에 발굴되어 몇 년 전 다시 전 세계 문예지의 기사란을 채웠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처럼, 시대를 초월한 가치가 재발견되는 예들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 중, 누가 무인지대로 들어가고 있고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재발굴 될 수 있을지도 상상해보게 되는군요.

안타깝게도 로버트슨 데이비스의 대표작 “숨어있는 남자”는 1996년 디자인하우스에서 두 권으로 출간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이지만, 나머지 두 작가, 그레이엄 그린과 존 윌리엄스의 책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대표작인 “권력과 영광”은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2010년 출간된 책이 있습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알에이치코리아에서 2015년 1월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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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지대(n0 man’s land)는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