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5] 사건의 원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1017029004

1990년대 미국 뉴욕의 범죄율이 급격하게 감소하자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제시했다. 한때 가장 인기를 끌었던 원인은 1960년대 이루어진 한 심리학 실험에서 유래한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이름의 가설이다. 1969년 스탠퍼드 대학의 필립 짐바르도는 치안이 허술한 동네에 두 대의 차 보닛을 열어 두되 한 대만 창문을 조금 깨어 놓았다. 1주일 뒤, 그는 두 차 중 유리창이 깨진 차만이 타이어가 사라지는 등 완전히 망가진 것을 발견했다.

깨진 창문 이론이란 결국 사소한 문제가 큰 문제를 부른다는 것이다. 당시 뉴욕시장이었던 줄리아니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경찰들을 동원해 뉴욕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고 보행신호 위반, 쓰레기 투기 등의 경범죄를 단속했다. 결과적으로 중범죄를 포함한 뉴욕의 범죄율은 크게 줄었다. 그런데 정말 살인, 강도 등의 중범죄가 지하철 낙서와 관계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1990년대에 미국의 전체적인 범죄율 감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01년 ‘괴짜경제학’의 저자인 스티븐 레빗은 동료 경제학자 존 도너휴와 함께 다양한 자료를 통해 뉴욕 범죄율 감소에 대한 새로운 원인을 제시했다. 바로 1973년 이루어진 낙태의 합법화가 그것이다. 그는 아이를 키우기 힘든 환경에서 낙태가 더 많이 이루어지며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과 함께 실제 데이터를 이용해 낙태 합법화가 미국 범죄율 감소의 50% 이상을 설명한다는 것을 보였다.

2000년대 중반 범죄율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등장했다. 공기 중 납 성분이 아이들의 뇌를 손상시켜 자기통제력과 판단력 등에 문제를 만들며 폭력적인 성향을 높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40년대에서 70년대까지 페인트에 납을 사용했으나 납의 독성이 알려지면서 70년대부터 이를 금지하고 기존의 페인트를 제거한 일이 있다. 최근 이 가설을 다양한 형태로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최근 한 연구는 위의 요소들 외에도 CCTV의 증가, 사설 경비원 수의 증가, 신용카드의 사용, 자동차 도난방지 기술의 발달 등이 모두 범죄율 감소에 조금씩 기여했음을 보였다. 아마 뉴욕 범죄율 감소의 원인은 이런 요소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가장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는 범죄라는 분류에 매우 다양한 사건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며 또한 한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무수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원인을 찾는다. 인간이 원인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사건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누구를 비난할지를 정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원인을 찾는 행동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면이 있으며 이는 이를 통해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주제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바로 한 사건에 대해 존재하는 수많은 원인들 중 미래를 위한 교훈을 찾을 수 있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같은 실수를 피하게 해 줄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각각의 사건은 원인을 찾아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며칠 간격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사건들이 과연 원인을 찾아서 같은 문제를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도 알 수 없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제대로 된 문제를 찾아서 그 같은 문제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17.08.27] 질문의 정치학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829029004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주인공들은 의문이 생기더라도 상대방에게 잘 묻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문화와 하루키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철학인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의 반영으로 보인다. 물론 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이 계속 그 문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법상의 요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주인공이 한 중년 여성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궁금해하면서도 묻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주인공이 묻지 않는 것이 왜 특이하게 보일까라는 자문을 통해 오히려 우리가 호기심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인은 질문을 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호기심을 치하하고 질문을 권장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 하지만 질문의 과정에는 정치학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복잡한 현상이 존재한다.

질문은 생각만큼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상하관계가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다분히 정치적 행위다. 국정조사에서 국회의원들의 흔한 호통이나 검찰의 취조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질문이 정보를 요구하는 행동이며 묻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의 비대칭성에 의해 상하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하는 상황이나 낯선 곳에서 길을 물어야 할 때, 묻는 사람이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상하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상하관계는 정보를 가진 자와 필요로 하는 자의 관계로 볼 수 있다. 묻는 사람은 답해 줄 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위치에 있게 되고, 정보를 제공해 줄 경우 존경이나 감사와 같은 어떤 보상을 주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에도 질문의 정치학은 성립된다. 교육현장에서와 같이 질문이 분명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며 상대의 도움을 원하는 가운데 나온 행동이라 하더라도 질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질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대답의 의무가 존재하고 이를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길을 묻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답을 주지 못했을 때 죄송하다고 말하게 된다.

질문이 가진 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교육과정은 사실상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문을 들었을 때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답을 먼저 말하려는 충동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질문은 종교나 영업, 혹은 호감과 같은 다양한 이유로 낯선 사람에게 말을 트고 뭔가를 얻어내려는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기술이 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데 급급해 그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쉽게 잊는다.

하지만 질문에 답을 찾기보다 질문이 적절한 것인지를 따져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매카시즘의 피해자였던 한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영화인 ‘트럼보’에서 주인공은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느냐는 청문회 질문에 자신이 범죄의 피고인지를, 곧 자신이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를 되묻는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주인공이 마침내 그 여성에게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물었을 때, 그녀 역시 하루키 소설의 인물답게, 답하되 답하지 않는 기발한 답을 말한다. 자신은 읽고 있는 책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징크스가 있다고 말하며 책의 제목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일방적인 상하관계를 만들지 않으면서도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훌륭한 답이 아닐 수 없다.

[2017.07.16] 설명과 이해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718029004

최근 미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는 자신의 판단을 설명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근래 인공지능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딥러닝 기술이 가진 문제, 곧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배경이 있다. 즉, 병원이나 법원에서 인공지능이 한 사람의 병명을 진단하거나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을 때, 인공지능이 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사람들이 이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그렇다면 인간은 설명을 잘 하는가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을 잘하고, 여러가지 일에 대해 모두 설명을 잘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좋은 설명과 나쁜 설명이 있으며, 인간이 이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에게 설명을 평가하게 한다면, 인공지능이 설명을 잘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는 별개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 보자. 바로 ‘설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는 설명이 너무나 일반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추상적인 질문일 수 밖에 없다. 일상에서 설명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글과 대화의 상당부분이 설명이며, 어쩌면 모든 의사소통은 설명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가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설명의 특징을 파악하기위해 조금 범위를 좁혀 생각해보면, 설명과 이해 사이의 깊은 연관관계가 발견된다.

설명과 이해는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해가 있어야 설명이 가능하며, 이해한 만큼만 설명할 수 있다. 그 설명을 통해 다른이는 다시 이해에 이르며, 인류의 지식이 축적된 과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설명을 하는 이 역시 자신의 설명을 통해, 곧 그 설명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더 깊은 이해에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점점 더 그 문제에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설명에 관해 떠오르는 이야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인슈타인의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너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는 말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해한 만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리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하는 설명은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지식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먼 경우 이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를 잘 드러낸 이야기가 아인슈타인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20세기 후반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불리는 파인만의 말이다. 그는 “내가 그 내용을 아무에게나 이해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그걸로 노벨상을 받았겠는가”라 말했다 한다. 아인슈타인의 말만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말이며, 단지 아인슈타인은 할머니에게 설명을 요구했을 뿐 이해시키기를 요구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인슈타인의 말은 오늘날 나왔다면 다른 측면에서 문제제기를 당할 소지가 있다. 여기서 할머니가 쓰인 맥락 때문이다. 10여년 전, 한 첨단기술을 다루는 잡지에서 아두이노라는 초소형 컴퓨터를 홍보하며 뉴스레터의 제목으로 “심지어 당신의 엄마도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정확히 4시간 뒤 편집장의 사과문이 메일함에 도착했다. 그 사과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나 역시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이런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무책임하고 성차별적인 제목은 다시는 쓰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런 무의미하고 공격적인 제목이 다시는 여러분의 이메일함에 보이지 않도록, 오늘부터 우리는 제목을 검수하는 추가적인 단계를 만들것입니다.”

적어도 그 잡지는 자신들의 입장과 지향하는 바를 잘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2017.06.04] 캐치볼과 가르침, 대화의 공통점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06025004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는 인간이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지를 지난 10만년 사이에 발생한 결정적 계기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가 첫 번째로 꼽는 계기는 약 7만년 전 호모사피엔스에게 일어난 ‘인지혁명’으로 인간이 언어를 통해 지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이 오직 유전자를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번거로움을 시간과 에너지의 관점에서 모두 극도로 효율적인 형태로 대체한 인지혁명이 인간의 진보에 결정적 계기가 됐음은 확실하다.

정보, 곧 지식의 전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유전자의 목적처럼 환경과의 경쟁인 생존, 그리고 다른 개체와의 경쟁인 번식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식을 습득하는(또는 배우는) 능력과 자신의 후손과 동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가르치는) 능력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음은 당연하다. 또 가르침과 배움이 일상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본성 속에 이를 위한 능력이 녹아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본성을 이해하고 이를 현대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 판단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배움의 방법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유전자에서 언어와 지식으로 승화했던 과거의 혁명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키는 것이며, 지식 전달에 관한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다음 두 가지 이야기는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 있었을 때 지식을 더 잘 전달하게 만들어 주었던 이야기이다.

미국 하버드대 교정 한가운데 위치한 메인 야드 북쪽에는 ‘데릭 복 센터’가 있다. 전임 총장인 데릭 복이 세운 센터로, 1991년에 그가 20년 동안 총장으로 재직한 공을 기려 학교 측이 그의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가르치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으며 교수법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매 학기 신임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을 연다. 다양한 주제의 세션들이 열리고 각 세션에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며 몸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배운다. 워크샵의 마지막 순서는 5분간의 모의 강의 녹화다. 이 녹화를 가지고 일주일 뒤 모든 참가자들은 개별적으로 전문가의 피드백을 받게 된다.

이때 들은 이야기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캐치볼, 곧 공을 주고받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당시 강사는 캐치볼의 특징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공을 던지기 전에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위해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며 내가 던지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공을 던진 뒤에는 상대방이 잘 받았는지를 끝까지 확인한다.

곧, 가르치는 사람 또한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잘 받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소설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에 나오는 ‘대화’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극 중 한 인물을 통해 대화를 캐치볼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져서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는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날아온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낸다.”

오스터는 대화의 본질이 상대방에게 맞춰 나가는 것임을 말한다. 좋은 대화란 나의 이야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며, 내가 하려는 말 역시 상대방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 두 이야기는 캐치볼이라는 놀이를 통해 가르친다는 것과 대화의 공통점을, 곧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상대방의 수준을 파악하고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 준다.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 배려심에서 출발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꼰대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의 말을 앞세우느라 결국 다른 사람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이들일 지 모르겠다.

[2017.04.23] 시간과 합리적 선택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425029008

합리적 선택의 가장 어려운 점은 우리가 가진 정보의 불확실성에 있다. 그 불확실성의 상당부분은 바로 미래가 가진 불확실성에 의거한다. 현재의 모든 선택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각 대안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예측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정보를 찾는데 드는 비용, 그리고 예측을 위해 필요한 계산에 드는 비용은 쉽게 합리적 선택을 통해 얻게되는 편익, 곧 대안들의 차이를 초과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노력은 무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 손쉽게 개선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적 비합리성이 하나 존재한다.

먼저 마쉬멜로 실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70년대 스탠포드에서 이루어진 이 실험에서 4살 아이들은 눈 앞의 마쉬멜로 하나를 먹지말고 기다리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하나를 먹었고, 어떤 아이들은 보상을 받았다. 이 실험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몇 십 년 동안 이루어진 후속실험 때문이다. 곧, 참았던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사이에 SAT 성적을 비롯한 다양한 성취의 차이가 있었으며, 연구진은 그 원인으로 ‘만족지연능력’, 곧 참을성을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실험에 대해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아이가 참지 못했던 것은 참을성의 부족이 아니라 어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불안정한 환경의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 아이는 확실한 현재의 하나와 불확실한 미래의 두 개 사이에서 확실한 현재의 하나를 택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비합리적 선택이 되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아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5달러와 한 달 뒤의 10달러를 선택하게 한 실험에서 많은 이들이 눈앞의 5달러를 택했다. 이는 ‘미래 할인’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진 인간의 대표적 비합리성이다. 인간이 현재에 비정상적으로 큰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이 오류는 ’현재지향 편향’이라고도 불린다.

우리의 모든 선택이 현재를 넘어 미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 비합리성은 인간에게 매우 치명적인 단점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진화는 어떤 이유로 이런 판단기제를 만들어낸 것일까? 다시 마쉬멜로 실험으로 돌아가자면, 바로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진화 과정에서 인간은 훨씬 더 불확실한 미래를 경험했다. 동굴에 사는 인류의 조상에게 지나가는 외지인이 미래의 무언가를 약속했을 때 이를 받게될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몇 달 이나 몇 년 뒤 자신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현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여느 인간의 본능과 마찬가지로, 이런 판단기제는 그 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본능적 비합리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바로 이웃과 사회, 국가를 믿을 수 있고, 몇 달 몇 년 뒤에도 상당히 높은 확률로 내가 살아있을 것임이 분명한 오늘날, 보다 먼 미래의 나에게 유익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5년마다 돌아오는, 단일 사건으로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앞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결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린 선택의 합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그 선택이 합리적일수록 모두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각 후보가 어떤 계층을 대변하며, 누구의 이익을 우선하는 지를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직 여기에도 미처 이르지 못했다. 물론 이 기준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인이나 친족의 유익을 구할 이를 뽑아서는 안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이제는 어떤 정책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넘어, 보다 먼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장기적 효용을 제공하는지를 고려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오십 년 백 년 뒤의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는 후보를 보고 싶다.

[2017.03.12] 과학자는 울지 않는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314029008

오늘날 인터넷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각각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교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게 되며, 누군가의 비정한 운명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행운에 안도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슬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다음 질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바로 어떤 이야기를 우리가 슬프게 느끼는 것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왜 인간이 슬픔을 느끼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와 지식인들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진화를 통해 발생했음을 받아들인다. 진화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특성을 가진 개체가 세대를 거쳐갈 수록 개체군 안에서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진화 이론의 한 갈래인 진화심리학은 키와 피부색 같은 육체적 특성을 넘어, 인간의 특정한 행동과 이를 유도하는 감정 역시 진화의 영향 아래 있음을 말해주는 학문이다.

곧,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그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맛있는 음식은 영양가가 높고 인체에 필수적인 성분을 가지고 있어 이를 좋아하는 것은 생존에 유리했다. 아름다운 이성은 환경에 잘 적응한, 혹은 성선택의 측면에서 유리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나의 유전자를 번식시킬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호감은 번식에 유리했다. 기쁨이란 바로 이런 호감에 대한 보상이다.

이제 슬픔이라는 감정이 왜 존재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은 바로 우리에게 특정한 행동이나 상황을 회피하도록 만들기위해 존재하는 감정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중요한 자원의 손실, 배우자의 부정 등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을 불리하게 만들며, 따라서 개체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곧 슬픔을 유발하는 상황을 미리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왜 인간이 슬픔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슬프게 느껴지는 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다른 재료가 필요하다. 하나는, 인간은 이야기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정보를 의미하며, 정보는 그 자체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된다. 옆 마을의 갑돌이가 뒷산에서 곰에게 물려 죽었다는 사실은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보이며, 이 사건으로인해 갑순이의 연애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는 번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가십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도 언급된다.

또다른 재료는 바로 마음속에 가상의 현실을 그리고 이를 수행해보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험한 일을 실제로 시도하지 않고도 피할 수 있게 만들어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 곧 가상의 불행한 일을 상상하는 것은 실제 현실을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기쁨이라는 보상을 얻게 되었다. 이 설명은 사람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에서도 언급된다.

즉, 당신이 다른 이의 슬픈 이야기를 읽고, 이를 나누고 싶어하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이 과학자가 울기에 앞서 처음 이야기한 질문을 가짐으로써 얻게된 보상이다.

물론 과학자가 울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는 ‘수학자는 복권을 사지 않는다’, 혹은 ‘경제학자는 보험을 들지 않는다’와 같은 선언적 표현이다. 수학자가 기대값이 1보다 클 때 복권 판매소로 가고 경제학자가 오랜만에 건강검진을 받기 전에 보험을 드는 것처럼, 과학자 역시 눈앞의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이 충분히 합리적이고 장기적으로 자신의 정신건강에 득이된다고 여길 때, 비로소 안심하며 호르몬의 지시를 따를 것이다.

[2017.01.30] 첫인상과 진화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131029007

최근 대학생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전공 선택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는 취업과 면접으로 옮겨갔다. 나는 얼마 전 몇 명을 면접 본 일을 떠올리며, 면접관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지원자의 많은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물었다. “그렇게 많은 것이 보인다면, 면접에서 과연 얼마나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좋을까요?”

면접은 제한된 정보로 실체를 추측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전형적인 공학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력과 학력, 자소서 등의 서류 전형과 대화와 질문으로 이루어지는 대면 심사, 물건을 파는 미션, 인턴 과정 등이 모두 최소한의 비용으로 정보를 얻어 효율적인 계약관계를 이루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결혼을 염두에 둔 이들이 서로 소개를 받고 데이트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 역시 남은 인생을 함께하게 될 지 모를 그 사람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체로 상대를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수록 판단의 정확도 역시 높일 수 있지만, 너무 많은 정보는 그 자체로 소음이 되기 쉬우며 특히 매몰비용의 문제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기연애로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를 놓친 이들은 빠른 판단의 중요성을 실감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 여년 전 말콤 글래드웰이 에서 말한, 첫 인상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은 큰 의미를 가진다.

같은 종의 다른 개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진화의 동인은 ‘생존’과 ‘번식’이며, 이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형질이 시간에 따라 개체군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됨을 의미한다. 더 유능한 동료와 더 좋은 배우자를 고르는 일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각각 중요한 능력이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어느 정도 이를 위한 능력, 곧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질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사람들이 지성과 미모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관점으로 설명한다.

물론 동료와 배우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상호성의 원칙은 유지된다. 비록 누구나 더 나은 직장 – 회사의 입장에서는 더 나은 사원 – 과 더 나은 배우자를 원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그에 합당하게 높이지 않는 한 이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직업과 연애 모두 이런 상황에서 ‘눈높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즉,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 못지않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진화는 또다른 흥미로운 능력을 발전시켰다. 바로, 자신의 가치를 부풀려 상대를 속이는 능력이다. 이는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능력에 발맞춰 창과 방패의 관계로 발전해왔다. 거짓말과 사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화장도 그런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성형에 부정적인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면접에서의 포장 역시 크게 보아 이런 측면에 속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모든 것이 간단하지는 않다. 우선, 최소한의 포장, 예를 들어 적당한 화장이나 깔끔한 복장은 면접과 데이트에 있어 그 사람의 생활 태도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특성에 관한 정보를 줄 수 있으며, 바로 이런 성의나 여유야 말로 때로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또한 포장 역시 하나의 능력이며, 거기에 넘어 갈만한 연인이나 면접관에게만 작동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동작한다는 특징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생각은 무엇이 포장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 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 학생 은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포장을 의미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러했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그 학생에게, 포장은 언젠가는 밝혀지며 따라서 보다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리고 포장에 들일 시간과 노력을 보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뻔한 답을 주고 말았다.

[2016.12.19] 이해란 무엇인가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1220029005

한때 이해는 암기의 반대말이었다. 시험이 대체로 한 사람의 암기능력을 확인하는데 그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공부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은 단순한 암기가 아닌 이해를 강조했다. 나도 그들을 따랐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할 때, 나는 그 개념의 다양한 응용을 알려주며 동시에 암기가 아닌 이해를 요구했다. 그리고 때로 학생들이, 혹은 나 스스로 내게 물었다. 과연 이해란 무엇일까?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배운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말, 자신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지식과 이 새롭게 배운 사실의 관계를 파악해 이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며, 이를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그들이 배운 새로운 개념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도록 시켰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해’란 절대 ‘언어’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이다. 물론 최초의 깨달음은 종종 비언어적 형태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현해주는 이를 작가라고 했던가. 어쨌든 자신이 이해한 바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의 옷을 입혀야만 한다. 미래의 자신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인 기억을 활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단적인 주장이 반발을 불러일으키듯이, 암기에 대한 과도한 격하에도 반발이 따랐다. 이들은 암기 자체가 가진 힘을 역설했고, 결국 이해란 암기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암기가 개념들의 무작위한 나열이라면, 이해는 그 개념들에 순서와 관계를 부여해 하나의 개념이 다른 개념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식으로 작동한다. 실생활에서 많은 경우 이해는 암기를 위해, 즉 손쉬운 지식의 인출을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분야에서 가능한 문제와 답을 완벽하게 암기할 수 있다면, 그는 그 분야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암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훨씬 더 많은 상황이 있다. 그 경우, 우리는 다시 근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마치 정반합의 논리처럼, 오늘날 이해와 암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가 되었다. 이해는 암기에 도움이 되며, 암기 또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는 그 분야의 특징, 곧 그 분야가 반복되는 현상에 대해 정해진 답을 적용하는 분야인지, 혹은 늘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며 근본적인 원리를 끊임없이 응용해야 하는 분야인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느새 인공지능의 시대가 다가왔다. 우리는 컴퓨터가 암기에 인간보다 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인간만큼 이해를 할 수 있는지 묻는다. 얼마 전 구글이 발명한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구글의 프로그래머들은 18,900개 영화의 대사를 이용해 이 프로그램이 모호한 질문이 주어져도 적당한 답을 내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게 “인생의 목적이 뭐지?”라 물었을 때, 프로그램은 “세상을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죠” 라 대답했다. 놀라운 답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쉽게 한계를 드러냈다. 고양이의 다리가 몇 개인지라는 질문에는 네 개 라는 답을 하지만, 지네의 다리가 몇 개인지 묻자 여덟 개라 답하고 만다. 그 글의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 프로그램은 그저 단어들의 조합을 알 뿐, 실제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즉, 실제로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지네가 무엇인지를 이 프로그램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다행히 인공지능은 아직 인간 수준의 이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지 모른다는 걱정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강점으로써, 이해에 대한 강조가 더욱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2016.11.07] 과학자의 다이어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1108029006

다이어트는 자기계발이라는 21세기 신흥 종교의 핵심 교리다. 이 교리의 특징은 외모라는 일상의 권력기준에서 동력을 얻지만, 건강이라는 이 시대 또다른 진리의 절대적 지지를 동시에 받는다는 점이다. 비록 시대에 따라 선호되는 체형이 변한 것처럼 변화의 여지는 있을지라도, 값싼 풍요가 만든 비만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며, 따라서 앞으로도 이 교리의 위세는 약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이어트의 가장 손쉬운 기준으로 쓰이는 것은 한 인간의 물적량을 숫자 하나로 환원시킨 몸무게라는 값이다. 키라는 또다른 인간의 특징을 제곱해 앞서의 몸무게를 이 결과로 나눔으로써, 우리는 키에 관계없이 비만을 판단할 수 있는 체질량지수(BMI)를 얻는다. 물론, 성인의 경우 키는 크게 변하지 않으므로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체중 변화를 수시로 측정해 이를 실천의 동기로 삼는다. 이렇게 자신의 체중을 재는 방법은 실제로 효용이 증명된 매우 드문 다이어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체중의 변화를 지배하는 첫 번째 원칙은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간단히 말해 어떤 대상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겪더라도 변화의 전후로 그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우유 팩 하나를 들고 체중계 위에 올라선 당신이 우유를 다 마시는 동안 체중계의 수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유 팩 하나는 200ml 이고, 액체의 비중은 대체로 1에 가까우므로 우유가 팩 안에서 당신의 위로 옮겨오는 동안 당신의 체중은 200g 이 늘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은 간단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체중을 증가시키고 몸에서 나오는 것은 체중을 감소시킨다. 평소 체중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만큼의 무언가가 몸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밥 한 공기는 100g 정도이고 한 사람의 식사량은 수백 g 안팍으로, 보통 물과 음료를 포함한 2-3 kg 정도가 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간다.

몸에서 나오는 것은 고체와 액체의 두 가지 형태를 가진다. 고체는 크기에 따라 한 번에 100-300g 정도이며 액체는 하루에 1-2 kg 에 이른다. 나머지는 피부 표면을 통해 증발하는 체액으로 매 시간 수십 g 이 빠져나간다. 밤 사이 줄어든 체중은 이때문이다. 어쨌든 질량보존의 법칙은 매우 단순한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데,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면, 체중은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이해했다면, 다음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에너지는 곧 열이며, 다이어트의 세계에서는 열의 단위인 칼로리가 쓰인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이는 음식을 통해 섭취할 수 밖에 없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질량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몸에 들어온 에너지에서 우리가 사용한 에너지를 빼고 나면 남은 만큼이 우리 몸에 축적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활동은 체온 유지로, 전체 소비의 절반 이상이 여기에 쓰인다. 물론 외부 기온, 활동량, 땀을 통한 체온 조절 등 다양한 변수가 있다. 그리고 뇌신경의 전기적 활동, 근육의 육체적 활동, 소화를 위한 내장기관의 활동에도 에너지는 소모된다. 운동은 건강한 삶의 유지에 꼭 필요하지만, 다이어트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들이 최근 발표되고 있다.

결국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적게 먹어야 한다. 다이어트가 필요해진 이유는 현대의 인간이 먹을 것이 부족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먹어두는 것이 유리했던 시대에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그들이 또한 우리에게 물려준 이성을 사용해 적절한 시점에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 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짜장면이 나오면 아이들은 중국집에 가자고 말하고, 치킨이 나오면 치킨을 주문하자고 말한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애들아, 저런걸 간접광고(PPL)라고 한단다.”

[2016.09.26] 한 시간의 가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927029006

빌 게이츠는 길에 떨어진 100달러의 지폐를 주울 필요가 있을까?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국내에 잘 알려진 하버드의 샌델 교수가 수업 중 빌 게이츠의 재산에 대해 이야기하며 던진 질문이다. 그는 빌 게이츠가 초당 150달러를 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시간을 들여 그 100 달러를 주울 가치가 없을 것이라 약간의 농을 섞어 말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 진지하게 답하는 이들은 그가 돈을 줍는다고 해서 다른 수입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가 100 달러를 줍는 것이 합리적이라 말한다. 이를 반박하는 이들은, 그가 돈을 줍는 동안 그렇지 않았다면 할 수 있었던 일을 못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그에게 합리적 행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빌 게이츠 본인은 한 인터넷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기꺼이 줍겠다고 말했다 한다.

샌델이 처음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빌 게이츠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를 조금 바꾸면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즉, 당신이 가진 시간의 가치를 어떤 행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빌 게이츠가 아니기 때문에 1초가 아니라 한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이를 각자가 가진 한 시간의 가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한 시간의 가치는 어느 정도 일까? 한 달에 20일, 하루 8시간을 근무한다면 한 달 근무 시간은 160 시간이며 따라서 한 달에 160만 원을 받는 사람의 시급은 만 원이 된다. 320만 원은 2만 원이다. 연봉 1억인 사람은 실수령액 기준으로 시급 4만 원 쯤 된다. 대부분 사람들의 한 시간은 이 정도 가치를 가질 것이다.

부업은 연봉이 아니라 시급이 직접 기준이 된다. 편의점, 커피숍, 프랜차이즈 등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최저 시급인 6,030 원을 받거나 조금 더 받는다. 몇 십 년째 금액이 바뀌지 않는다는 과외는 인기있는 아르바이트 자리이지만, 일 주일에 두 시간 씩, 두 번 일해 월 30만 원을 받는다면 시급은 2만 원이 조금 못된다. 최저 시급에 비하면 충분히 높지만 이동시간과 시간적 제약을 고려하면 큰 차이는 아닐 것이다.

반면, 시간으로 비용을 산정해 훨씬 높은 값을 받는 직업도 있다. 간헐적으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하는 전문가가 여기에 속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예술가, 모델, 동시 통역가나 후자에 해당하는 변호사, 변리사는 모두 시간 당 수십만 원을 받는다.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강사들의 강연비도 보통 수십만 원 선에서 결정된다. 물론 이들의 한 시간에는 수십 시간의 준비가 녹아있을 것이다.

전문가나 강사가 책을 내거나 방송에 출연하면 가치는 올라간다. 때로 몇 배로 뛰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몸값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연예인에게도 쓰이는 표현이다. 누군가를 행사에 한 번 초청하는데 수천만 원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인터넷 가십란을 종종 장식한다. 그 사람의 수입이 그 사람의 몸값이 되는 분야가 하나 더 있다. 보험업계에서는 사고로 인한 보상금을 그가 미래에 벌 수 있었을 수입에 바탕해 계산한다.

물론, 자유시장에서 거래는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밀턴의 말처럼, 이들의 가치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더 잘생기고 더 예쁜, 더 똑똑한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저녁시간을 차지하게 만든,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전자공학과 통신기술의 발달을 빼놓을 수 없다.

기술은 지금도 직업 시장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1~20년 내에 인공지능과 로봇은 직업 시장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술 발달이 사람들의 근무시간을 늘려왔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들을 대신해 일하게 되면, 처음으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 아빠에게 한 시간에 얼마를 버는 지 물은 뒤, 바쁜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아이가 커버리기 전의 시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를 가지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