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방아 가방아

움직이는 가방: 자율주행과 모빌리티의 확장

이번 CES 유레카파크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제품 중에는 트레블메이트 로보틱스(Travelmate robotics)의 완전자율주행 여행가방로봇이 있다. 여행가방이 완전자율주행로봇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일단 아래 유튜브의 영상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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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CES 에는 다양한 형태로 접히는 전기 바이크를 비롯해 전기 스쿠터 등 전년보다 훨씬 많은 모빌리티(이동수단) 제품이 등장했다. 이러한 전기 배터리 기반 모빌리티 시장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센서 기술을 포함한 HW 제조 기술과 제어 기술의 발전 등의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배터리 효율의 증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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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CES 2018에 소개된 다양한 모빌리티 제품들

특히 자율주행기술은 바로 모빌리티에 최신 기술인 IoT, 센서, 빅데이터, AI 등이 결합한 기술로, 4차산업혁명의 총아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빌리티의 본질에는 이런 혁명적인 IT 기술에 대립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모빌리티란 이동을 위한 것인 반면, 인터넷, 무선 통신, 모바일, 화상회의 등의 기술의 주요 효과가 바로 ‘이동하지 않고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기반의 재택근무나 가장 최신기술인 VR 역시 누군가의 이동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직접 이동’하는 것이 그만큼 힘든, 곧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인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준이다. 2014년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전체 에너지 소모량 중 이동을 위해 사용된 에너지의 비율이 29%에 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동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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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2016년 미국의 에너지 소모 중 이동을 위해 소모된 에너지의 양

이런 관점에서 IT 기술은 물리적 실체의 이동 없이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기술이며 전화에서 모바일, 화상통신을 거쳐 VR 로 이르는 기술의 발전은 그 정보의 폭을 넓힘으로써 그만큼 사람이 실제로 이동할 필요를 줄여 나간 역사라 볼 수 있다. (여기서 4차 산업혁명의 메인 키워드인 CPS(Cyber Physical System), 곧 물리 세계를 가상 세계에 구현, 혹은 대체 하는 기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기술이 발전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누군가와 실제로 만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때문에 텔레컨퍼런스 혹은 화상회의의 음질과 화질이 충분히 좋아졌음에도 사람들은 실제로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한다. 이는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른 뒤, 현실과 거의 유사한 VR 회의환경이 구현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최신 IT 기술이 역으로 모빌리티에 직접 적용되어 그 모빌리티의 에너지 효율을 비롯한 편의성과 활용성을 개선하는 기술, 곧 보다 쉽고 즐겁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이 편의성의 한 정점에 완전자율주행이 존재한다. 그리고 완전자율주행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로 이번 CES 에는 IT 기술과 모빌리티 기술이 가미된 몇 가지 제품이 등장했으며 처음 소개한 트레블메이트의 제품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앞서의 영상에서, 트레블메이트의 제품은 주인을 따라간다. 따라간다! 말만 들어도 매우 유쾌한 기분이 든다. 이 단어에는 마치 개가 주인을 따라간다는 말에서처럼 불완전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객체의 주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행위가 상대를 알아보고, 상대가 진행하는 방향을 파악해 이동하는 지능적인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작은 이러했으리라. 여행가방을 끄는 일은 분명 힘든 일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은 손잡이에 버튼을 두고 바퀴에 모터를 달아 내가 가방을 끌 때 바퀴를 굴려주는 것이다. (이런 제품이 있을까?) 하지만 이 상대적으로 쉬운 제품을 만들어본 이들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우선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다르다. 걷는 속도와 바퀴가 구르는 속도가 다를 경우 가방의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워지고 더 큰 힘이 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따라오게 하는 것이 몇 가지 트릭을 이용할 경우 더 쉬울 수 있다. 우선 주인을 알아보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가방의 양 귀퉁이에 리시버를 두고 주인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신호(아마 블루투스?)를 측정해 방향과 거리를 계산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장애물 센서로 적당한 수준의 요철이나 인파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바닥의 상태가 매우 나쁘거나 사람들이 매우 많을 때에는 직접 끌어야 할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2016년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인디고고의 캠페인에서는 가격을 $399, $495, $595 로 매우 저렴하게 책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33명의 후원에서 멈춘 것으로 보아 캠페인을 조기종료한 듯 하다. 물론 다른 크라우드 펀딩 제품들처럼 이들 역시 2017년 6월을 출시 목표로 잡아 놓았고, 댓글을 보면 지난 해 12월 까지 배송을 하지 않은 듯 하다. 홈페이지에는 크기에 따라 소형 $1,099, 중형 $1,295, 대형 $1,495 로 가격이 나와있고, 적정한 가격으로 보인다. 주문 폭주로 배송에 최대 90일이 걸릴 수 있다고 한다. CES 부쓰에서 적어도 이 제품이 잘 작동하는 것은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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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트레블메이트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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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CES의 모든 제품에는 천적 관계인 제품이 존재한다.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다. 트레블메이트의 가방을 한참 보다보면 어느새 스스로 따라오는 가방이 고맙다는 생각은 잊혀지고, 다리가 슬슬 아파오면서 이 가방이 나를 내가 가려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으면 하는 간사한 마음이 떠오른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트레블메이트 부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제품이 존재한다. 바로 모도백(Modobag)이라는 제품이다.

모도백의 가격은 $1,495 이며 2018년 1사분기에 출시 예정이다. CES 부스 앞 쪽에는 넓은 공간을 두어 많은 사람들이 모도백을 타고 놀도록 만들었다. 가방 자체의 무게는 9kg 이며 1시간 충전으로 10km 를 갈 수 있다. 시속 8km (걷는 속도의 두 배)와 12.8km (세 배)의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단점이라면, 이걸 타고 가는 동안 사람들의 눈길을 많이 끈다는 것(이건 별로 큰 단점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타고 가는 자세가 별로 멋있지 않다는 것(이건 매우 심각한 단점이다)이다.

5. 같은 문제, 다른 해결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여러 방식의 해결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각각의 해결 방식이 조금씩 다른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모두 살아남는 경우도 있고, 그 중에서 한 가지 방식이 결국 시장을 차지하게 되기도 한다. 이 보고서의 여러 다른 섹션에 그러한 예들을 거듭 이야기하였다. 이 섹션에서는 그 중에 특히 실시간 통역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세 가지 기기, 곧 구글의 픽셀버드, 일본 소스넥스트의 포키토크, 네이버의 마스를 다루려 한다. 그에 앞서 음성기술에 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 음성 기술

애플의 시리와 구글의 구글 어시스턴트가 아이폰과 안드로이드에 포함된 것은 이미 오랜 일이다. 위키는 시리의 출시를 2011년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2014년 11월 아마존이 내놓은 아마존 에코와 알렉사가 여러 다른 회사들의 서비스와 결합하면서 음성 기술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지난해(2017년)의 CES를 음성기술 대중화의 원년을 알리는 행사로 묘사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음성기술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다양한 기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대화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소통수단이다. 시각은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지만 이는 이미 기록된 정보를 취득할 때(=책을 읽는 등)에만 그렇다. 문자를 아무리 빠르게 치는 이들도 어느 순간 답답함을 느끼고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또한, 대화는 상대방의 지성을 파악하는 기본적인 도구이며 이때문에 인공지능이 해결해야할 궁극의 문제이기도 하다. 곧 음성기술은 필연적으로 AI 와 연결되게 된다.

음성기술은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STT(Speech To Text) —> 자연어처리/AI —> TTS(Text To Speech)

STT 는 음성을 문자(혹은 의미를 나타내는 기호)로 변환하는 기술이다. 이렇게 변환된 문자는 자연어처리, 혹은 AI 인공지능을 통해 해석되며 답변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답변이 다시 음성으로 변환되는 기술을 TTS 라고 한다.

이 중 세번째 단계는 이미 충분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 최근 기계학습을 이용해 유명인의 목소리로 특정한 메시지를 말할 수 있게 만든 영상을 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를 문자로 바꾸는 첫번째 단계와 바뀐 문자의 의미를 파악하는 두번째 단계는 아직 만족스런 수준에 올라있지 못하다. 첫번째 단계가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는, 이 단계에서 사실상 어느 정도의 두 번째 단계 기술, 곧 의미를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사실 그가 내는 소리를 그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 말하는 상황과 맥락을 바탕으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예측한다는 뜻이다. 이때문에 다양한 발음의 차이나 사투리, 더듬는 말, 완결되지 않은 문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 일정한 수준에 오르고 나면 말하기보다 듣기가 어려워지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즉, 첫 번째 단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 기술은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는 오늘날 음성기술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만든다.

지난해 CES에서 필자는 알렉사가 적용된 몇몇 제품을 시연해본 적이 있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CES가 매우 시끄러운 장소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소음과 목소리를 구분하는 문제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파티장에서도 원하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바로 앞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수도 있으며, 책을 읽는 척 하면서 관심있는 옆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도 있다. 즉, 여기에도 목소리들을 구분하는 능력을 넘어 맥락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어떤 기기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야 할 때 그 누군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이 기기들이 듣기와 말하기를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AI 스피커는 시리나 오케이 구글, 알렉사와 같이 어떤 시작 신호를 말로 주어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또한 내가 말을 할 때와 시리가 말을 할 때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게다가 시리가 내 말을 이해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말을 하는 동안에는 내가 말을 할 수 없다. 사실 여기에도 맥락이라는 요소가 등장한다. 인간들 역시 정말로 할 말이 많은 두 사람이 만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가끔, 커피숍에서 이런 경우를 볼 때도 있다. 인간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하지만 많은 경우 대화의 흐름에 의해 한 사람의 말이 끝나는 시점과 그가 말을 덧붙이거나 상대방이 말을 시작하는 여부가 어떤 시선이나 음성 외의 정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한 연구는 이 간격이 0.3초 이내임을 보였다.) 때로 여러 사람이 같이 대화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말을 끊는 방식으로 혼란은 매우 빠르게 정리된다. 이 문제는 첫번째 문제보다 해결이 조금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세번째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로, 이들이 아직도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위의 자연어처리/AI 라는 두 번째 단계의 문제이다. 사실 위의 세 단계에서 양쪽, 곧 소리를 문자로, 그리고 문자를 다시 소리로 바꾸는 과정을 떼어내면 그것은 문자로 주어진 입력에 대해 문자로 주어진 출력을 내는 것을 말하며, 다름아닌 챗봇이 된다. 아직 대부분의 챗봇은 우리가 전문가 시스템이라 부르는, 일반적인 ARS 에서 번호를 선택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한정된 문제, 곧 특정 회사의 AS 응대나 물건 구매, 검색 결과의 보고 등 선택의 갯수가 제한된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잘 작동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공일반지능(AGI)’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직은 매우 어려운 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기술은 언제나 개선되며 성능 역시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조용한 집안에서 한 사람만이 이야기할 때 첫번째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불을 키거나 음악을 연주하라는 명령만을 내린다면 두번째 문제와 세번째 문제 역시 큰 불편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필자 역시 운전 중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때 시리를 자주 사용한다. 단지, 친구 이름을 부르고 “전화해”라고 말했을 때 아이폰에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20년 전 김혜수가 운전을 하면서, “우리~집”이라고 부르던 그 광고와 어떤 차이가 있을지 때로 궁금할 뿐이다.

1. 실시간 통역
이번 꼭지에서는 구글의 픽셀버드, 네이버의 마스, 일본 소스넥스트의 포케토크를 볼 것이다. 위에서 음성기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실시간 통역은 사실 위의 세 단계 중 가운데 ‘자연어처리/AI’ 단계가 ‘번역’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즉, 구글의 픽셀버드는 구글 번역을, 네이버의 마스는 파파고 번역을, 포케토크는 언어에 따라 구글 번역, 혹은 바이두를 이용한다고 한다.

결국 이 세 기기 또한 위에 지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세 기기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통역에는 두 단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나의 말을 상대방의 언어로 바꾸어 상대방에게 들려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말을 내 언어로 바꾸어 나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나의 입과 상대의 귀 사이에 필요한 번역기이며, 두 번째 단계는 상대의 입과 내 귀 사이에 있어야 하는 번역기를 의미한다. 아래 세 가지 기기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보자. 참고로, 픽셀버드와 마스는 이어폰이며 포케토크는 손바닥에 들어가는 기기이다.

1) 구글 픽셀버드
구글은 지난 12월 $159 (약 18만원)에 픽셀버드를 출시했다. 픽셀버드의 사용법은 이러하다. 나는 픽셀버드를 귀에 착용한다. 그 상태에서 나는 내 스마트폰을 상대에게 향한다. 나의 목소리는 내 픽셀버드가 듣고 내 스마트폰으로 보낸다. 스마트폰은 이를 번역해 음성으로 바꾸어 상대에게 들려준다. 상대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언어로 답하며, 스마트폰은 이를 듣고 나의 언어로 번역해 내 귀의 픽셀버드를 통해 내게 들려준다. 잘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사실 픽셀버드는 흔한 블루투스 이어폰에 적절한 UI를 입힌 다음 두 사람이 이어폰과 스마트폰을 나눠 가지게 만들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지금은 구글의 픽셀 스마트폰과만 이런 기능을 쓸 수 있지만 아마 여느 블루투스 이어폰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으로도 곧 이런 비슷한 기능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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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3 구글 픽셀버드

2) 포케토크(Pocketalk)
일본 소스넥스트사의 포케토크(Pocketalk)는 $300 의 가격으로 판매중인 제품이다. 사용법은 포케토크에 대고 말을 하면, 내가 설정한 다른 언어로 이를 번역해 화면에 띄워주는 것이다. (홈페이지에는 74개 언어가 가능하다고 나와있다.) 또한 상대가 그 언어로 말을 하면, 다시 나의 언어로 번역해 화면에 띄워주므로, 나는 그 내용을 보고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곧, 입력은 음성으로, 출력은 문자로 라는, 위 음성기술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했던 가장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포케토크 또한 인터넷 번역기를 이용하는데 (와이파이 또는 데이터 네트웍을 사용한다) 구글, 바이두 등 다양한 번역기를 이용한다고 되어 있다.

사용법이 매우 간편하므로, 편의성은 일견 가장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진 스마트폰의 통역 앱(예를 들어 구글 Translate)에서 이미 가능한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홈페이지에서도 스마트폰보다 디자인, 마이크, 스피커, 배터리 등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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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4 소스넥스트 사의 포케토크

3) 네이버 마스(MARS)
네이버 마스는 이어폰 하나를 상대에게 주는 조금 더 진화된 UX를 가지고 있다. 곧, 나의 말은 내 이어폰에 달린 스피커로 듣고, 이 말을 연결된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 번역기 – 네이버 파파고 – 로 번역한 후, 다시 상대의 이어폰으로 보내어 상대의 귀에 들려준다. 상대의 말은 상대의 이어폰에 달린 스피커로 들은 후, 스마트폰을 통해 번역 된 다음 내 이어폰으로 전달된다. 분명히 조금 더 진보된 방식이지만, 어떤 기술적 문제 때문인지 당시에도 시연을 하지 않았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출시를 하지 않고 있다. 당시 예상 출시 가격을 물었을때는 30만원 정도라는 답을 들었다. 타인의 어떤 제품을 내 귀에 넣거나, 내 물건을 타인의 귀에 넣게 하는게 어떤 위생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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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5 네이버 마스(Mars)

2.힙에어(HIP’AIR) vs 이본(eVONE)
이 두 제품은 넘어지거나 떨어져서 다치는 현상을 일컫는 낙상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다. 최근 한 언론은 ‘노년기 낙상이 암보다 위험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노인 3명 중 1명이 1년에 한 번 이상 넘어지며,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이 일어날 경우 1년내 사망할 확률이 17%에 이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넘어져서 생기는 부상을 막기 위해서는 넘어지지 않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기술은 이 문제를 깔끔하게 풀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는듯 하다. 그러나 아래 두 제품은 나름대로 현실을 개선시킨다.

1) 프랑스 회사인 이본(eVONE)이 만드는 것은 스마트슈즈이다. 이본의 신발에는 통신을 위한 GSM 칩, 위치를 알기 위한 GPS 센서, 그리고 자세 파악을 위한 자이로 센서와 가속도 센서, 압력 센서가 들어 있다. 이를 통해 이 신발은 착용자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을 때 이를 미리 정해진 보호자에게 알린다. 곧, 이 신발이 해결하는 문제는 넘어진 이후 주위에 사람이 없어 빨리 의료기관으로 옮겨지지 못하는 상황을 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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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6 스마트 슈즈 e-VONE
6개월 내에 출시예정이며 신발의 가격은 $100 ~ $150 (약 11-17만원) 으로 보통 신발과 비슷하지만 통신비용으로 매달 $20 (약 2만원)을 내야한다.

2) 힙에어(HIP’AIR)
힙에어 역시 프랑스 회사이다. 이 제품 또한 위의 이본처럼 넘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더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아래 사진이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힙에어는 엉덩이를 위한 에어백이다. 힙에어 벨트의 센서는 착용자가 넘어지는 것을 감지해 0.2초 안에 부풀어 올라 고관절 부상을 막는다. (운이 없어 머리 부상을 입지는 않을까? 물론 CES 에는 목에 착용하는 에어백 헬멧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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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7 낙상 방지 에어백 힙에어

역시 올 상반기 출시 예정으로 가격은 $800(약 90만원)로 저렴하지는 않다. 한 가지 우려는 매번 외출할 때마다 이 벨트를 차는 것이 귀찮기도 할 뿐 아니라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바지에 내장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3. 아이빗(iBeat) vs 소피허브(Sofihub)
아이빗과 소피허브 역시 노인을 위한 제품이지만 낙상을 포함해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노인의 안전을 다룬다. 곧, 노인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보호자에게 알리는 방법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1) 아이빗(iBeat)
아이빗은 노인을 위한 스마트워치로 심박수를 체크한다. 즉 심정지(Heart attack)에 의해 심박수가 떨어졌을 때 이를 보호자에게 알린다. 이 외에도 비상 버튼을 누르면 보호자와 통화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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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8 스마트워치 아이빗
인디고고에서 2016년 펀딩을 진행했고 2017년 여름 출시를 목표로 삼았지만 현재 2018년 3월로 옮겨진 상태이다. 당시 가격은 $100 이었지만 전시장의 직원은 가격을 $180이라 말했다.

2) 소피허브(Sofihub)
호주 스타트업인 소피허브는 집안에 방마다 배치하는 스마트 스피커를 통해 노인의 안전을 확인한다. 8개의 스피커가 한 세트로 가격은 $2,000 (약 220만원)이며, 스피커에는 동작감지센서가 달려 있어 노인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스피커는 각 방과 거실에 놓을 수 있으며 일정과 메시지를 알려줄 수 있다. 행동에 이상이 감지될 경우 스피커는 주인이 괜찮은지를 물어보고 여기에 답하거나 버튼을 눌러 괜찮다는 응답을 하지 않을 경우 보호자에게 연락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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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9 소피 허브

6. 같은 기술, 다른 용도

4. 디지털 vs 아날로그

이번 장의 제목은 언뜻 시대를 잘못 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몇 십 년 전, CD가 처음 등장해 수 십 년 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LP와 카세트 테이프를 서서히 사라지게 만들던 시기에 이런 관점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그 CD 조차도 물성이라는 아날로그적 특성 때문에 어느새 MP3 로 대체되었고, MP3는 다시 클라우드 서비스로 대체되었다. 결국 조금 더 디지털적인 기술이 등장할 때, 기존의 기술은 과거의 것이 될 뿐이다.

물론 최근 “아날로그의 습격”과 같은 책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LP나 종이, 카메라 필름 등 과거의 기술이 다시 유행하기는 하지만, 이들의 인기에는 이미 사라진, 혹은 사라져가는 것들이 그 희귀성으로 인해 획득하게 된 사치재(Luxury goods)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쿨하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지만, 살아난 이후에는 더 이상 쿨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혹은 아래 소개하는 러브박스처럼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더라도 디지털인 문자를 이용하는 것보다 조금 더 불편하게 상자를 열어 메시지를 읽게 하는 것이다. 효율과 속도를 가장 중시하는 이 세상에서, 이런 한 템포 느린 기술의 의미는 분명하다. 내가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 곧, 학을 접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비효율적인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생각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아래 첫 두 제품인 러브박스와 쇼트 에디션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가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제품이다. 반면, 세 번째 바오니스와 유니스텔라는 극단적인 디지털로의 변화 때문에 오히려 어색함을 느끼게 되는 오늘날을 보여준다.

1) 러브박스

아래 사진과 영상은 러브박스라는 야릇한 (혹은 달달한) 이름의 프랑스 회사이다. 제품은 매우 단순하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상자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이 회사의 앱으로 사랑의 문자를 보낸다. 상대방은 상자 앞 하트가 흔들리면, 당신이 보낸 세레나데가 도착했음을 알게 되고 상자를 열어 그 내용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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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5 스마트 메시지 박스: 러브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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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6 러브박스의 작동방식
물론 이런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도 전형적인 CES 사람들은 ‘복잡하게 그럴 것 없이 그냥 상대방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되지 않나요’라고 묻게 되는데, 그 경우 ‘정말 당신은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인가요’라는 애처로운 눈빛과 함께 ‘이쯔 낫 로맨띡’이라는 프랑스 억양의 체념 어린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이 제품으로 이제 그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면 어떻게 되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가격은 $99(약 11만원)이다.

2) 쇼트 에디션

또다른 아날로그 승리의 현장이다. 아래, 자판기처럼 보이는 이 제품은 도대체 무엇을 파는 걸까? 사진을 잘 살펴보면 1분, 3분, 5분의 세 종류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버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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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7 스토리 벤딩머신: 쇼트 에디션
이 제품은 바로 이야기를 판다. (물론 모든 제품은 자신의 이야기를 파는 것이지만, 이 제품은 실제로 ‘이야기’를 인쇄해서 판다.) 1분, 3분, 5분은 바로 그 소설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럼 무엇을 받고 팔까?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이들은 돈을 버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제품이 해결하는 문제는 바로 사람들의 지루함을 덜어 주겠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지루해할 수 있는 공간에서 그 사람들을 위해 이 기계를 구매하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잠깐의 틈만 생겨도 스마트폰을 꺼내는 시대에?) 즉, 이들은 이 이야기 판매기를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시설에 파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설의 소유자를 위해 기계의 윗부분에 광고를 달 수 있게 하고, 광고비를 서로 나눠가진다. 즉, 시설, 기계 회사, 사람들은 모두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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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8쇼트 에디션을 설치한 장소들

실제로 이 회사의 홈페이지에는 이 기계를 설치한 파리 공항, 펜스테이트 대학, 웨스턴 팜비치 도심 등의 이름이 있다.

3) 바오니스(Vaonis) vs 유니스텔라(Unistellar)

위의 두 제품과 달리 이 두 제품, 곧 망원경은 디지털의 또다른 정복을 상징한다. 물론 이들이 해결하려는 문제는 명확하다. 바로,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 아마 별은 인류가 인류가 아니던 시절부터 그들에게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알려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물론 다른 유인원이 별을 관찰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긴 하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별은 신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였고,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는 순수함을,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서는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 어머니…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 인류가 우주를 더 친숙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1977년 발사된 보이저 1호는 토성 근처를 지나면서 태양계의 행성들 사진을 찍었고, 지구는 아주 작은 점으로 나타났다. 칼 세이건은 이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우주 속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우리가 일상에서 매달리는 그 모든 것들이 우주의 시선에서 볼때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더 배려하고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마음이 바로 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문대는 아는 사람들은 아는 비밀의 데이트 장소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기 오염과 빛 공해 때문에 우리는 별을 보지 못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G20 국가 중 이탈리아에 이은 빛 공해 2위 국가로, 부모님 세대에서는 흔히 보았던 은하수를, 우리 세대에서는 맨눈으로 본 이들이 거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 두 제품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아래 바오니스(Vaonis)의 스텔리나, 그리고 유니스텔라(Unistella)의 제품은 모두 최신 광학기술을 이용해, 개인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망원경으로도 별 뿐 아니라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나 보던 성운, 성단, 그리고 다른 은하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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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9 바오니스(Vaonis)의 스텔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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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0 유니스텔라(Unistellar)

기존의 망원경에서는 실제 별에서 출발한 빛이 렌즈를 통과해 반사되거나 굴절되어 우리의 눈으로 바로 들어온다. 적어도 우리 눈에 들어오는 빛이 실제로 저 별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에 약간의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망원경에서는 렌즈를 통과한 빛이 디지털 카메라에 쓰이는 CMOS* 이미지 센서에 도달한다. 즉, 이들 망원경은 사실상 디지털 카메라와 같다. 단지 사진을 찍어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CMOS 이미지 센서를 이용해 이들은 빛을 증폭시켜,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장면들을 보게 해 준다. 문제는 어떻게 보여주느냐일 것이다.


* Complementary metal–oxide–semiconductor. CMOS 이미지 센서는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꾸어 저장해 주는 센서를 말한다.

스텔리나는 아래 사진처럼 아예 이미지 처리를 한 영상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전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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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1 스마트폰을 통해 별을 관찰한다
물론 고성능 센서와 이미지 처리 기술에 의해, 맨눈이나 소형 망원경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래와 같은 별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처음 이야기한 어색함이 등장다. 이렇게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것이 과연 실제 별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망원경의 방향을 움직임에 따라 영상도 바뀌며, 내가 원하는 밤하늘의 대상의 바로 지금 모습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 별을 관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의 측면에서, 스마트폰으로 별 사진을 보는 것이, 구글에서 그 사진을 검색해서 보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은하, 성단, 별자리는 그 사진이 찍힌 수 년 전에 비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심지어 구글에는 지표면이 아닌, 우주에 올라가 있는 허블 망원경이 찍은, 훨씬 더 선명한 사진들이 있다.

3-1) 바오니스(Vaonis)의 스텔리나

가격: $3,000

3-2) 유니스텔라

가격: $1,600

유니스텔라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들도 동의한다고 답한다. 비록 이들 역시 CMOS 이미지 센서로 영상을 기록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대신 망원경 옆에 위치한 아이피스를 통해 직접 눈을 대고 그 영상을 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바오니스처럼 편한 자세로 스마트폰을 통해 볼 수 있는 디지털 영상을 굳이 눈을 아이피스에 밀착해 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다르게 말하면, 어떤 문제를 가리고자 다른 불편을 만드는 것이 과연 올바른 해결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문제의 본질은, 이들 제품이 보여주는 것이 별에서 출발한 바로 그 빛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로 이미지 프로세싱을 거친 영상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두 제품을 한참 바라보다보면 알게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나은가가
아니다

아날로그 망원경, 곧 기존 업계는 시장의 관점에서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다. 기술은 발달할 만큼 발달했고, 가격 또한 내려올 만큼 내려왔다. 새로운 업체가 들어가기 힘들 뿐 아니라 시장의 규모 또한 정체되어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을 적용한 제품은 적어도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 그뿐 아니라, 기술의 개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즉, 아이피스든, 스마트폰이든 실제로 별을 보는 것과 점점 더 비슷한 경험을 만들 수 있게될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 또한 바뀐다.

두 회사는 기술적으로 그것이 가능해졌을 때,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을 뿐이다. 단지, 지금이 비즈니스 관점에서도 적절한 시점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다. 물론 그 답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이 두 제품은 한 가지 특징을 더 가지고 있다.

두 제품 모두 망원경과 삼각대를 배낭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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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2 이동성을 강조하는 바오니스와 유니스텔라

오늘날 소비 트렌드는 점점 더 물건보다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배낭 사진은 이런 스토리를 전달한다. “이 제품을 구매한다면, 당신은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당신만의 밤 하늘을 즐길 수 있습니다.” 솔깃한 제안이다.

5. 같은 문제, 다른 해결

3. 아프고 약한 이들을 위해

스티븐 핑커의 최신작 “세상은 어떻게 나아져왔는가(Enlightment Now)”에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향상시켰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빌게이츠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 책에 소개된 사실들 중 인상적인 다섯 가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1. 20세기 초에 비해 번개에 맞아죽을 확률은 1/37로 줄었다. – 번개가 치는 횟수는 여전하다. 그러나 일기예보, 안전교육, 도시생활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다.
2. 빨래에 드는 시간은 1920년 주당 11.5 시간에서 2014년 1.5 시간으로 줄었다.
3. 미국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인구가 지금의 2/5에 불과하던 1929년 연간 2만명이었으나 지금은 연간 5천명으로 줄었다. 이는 인구를 고려하면 1/10로 줄어든 것이다. 당시에는 산업재해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겼다.
4. 매년 IQ는 3포인트씩 좋아진다.
5. 전쟁은 불법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당연해보이지만, 1945년 UN 창설 이전에는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몇 가지 예외를 제하면 국제적 고립 및 경제제재는 전쟁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바탕에 기술의 발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지면 사람들은 다음 단계의 행복을 원하게 된다. 바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전세계 헬스케어 및 바이오 분야의 규모는 끝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CES 에서 헬스케어 영역은 매년 더 커지고 있다. 특히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동시에 출산이 줄어드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지난 해에 눈에 띄었던 것은 핏빗과 비슷한 스마트 손목 밴드를 가져온 중국 회사 셀 수 없이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계 기능과 운동량 측정 기능이 있는 스마트 손목 밴드의 가격은 100달러 선에 머물고 있었으나 필자는 전시회 마지막날 아이들 선물로 20달러에 중국산 스마트 밴드를 살 수 있었다.) 올해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제품의 증가가 특히 눈에 띄었다.

1) 지노(Gyenno)
대만의 이 회사가 해결하는 문제는 간단하다. 치매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병인 파킨슨 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손떨림이다. 손떨림이 심해지면 숟가락으로 밥이나 죽, 알약을 먹기 어려워진다. 다행히 오늘날의 센서 및 모터 제어기술은 손잡이 부분의 떨림이 숟가락 끝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이 떨림을 상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고 이 회사는 지난 해 정확히 그 일을 하는 숟가락을 만들었다. 곧, 손이 떨려도 숟가락 부분은 떨리지 않게 함으로써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가격도 $200(약 22만원)로 이 문제로 고생하는 이들이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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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0 지노 스푼 II

올해 이 회사가 가져온 제품은 숟가락에 이은 포크로, 역시 손떨림을 해결할 뿐 아니라 한 가지 새로운 기능을 추가했다. 바로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엄지에 버튼을 두어 포크로 스파게티를 먹을 때 버튼을 누르면 포크가 회전해 스파게티를 말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2) 사이렌 케어(Siren Care)
덴마크의 스타트업인 사이렌 케어는 당뇨병 환자를 위한 족부 체온 감지 스마트 양말을 만든다. 필자는 한 의학분야 학회에서 노인병 전문가의 발표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독거 남성 노인이 당뇨병 진단을 받을 경우, 그 분은 몇 년 안에 발을 자르게 됩니다.” 당뇨발이라 불리는 이 증상은 발의 작은 상처가 염증으로 발전해 발을 썩게 만드는 것이다. 사이렌 케어는 발의 온도를 측정하고 스마트폰으로 이를 관리해 상처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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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1 스마트 양말 사이렌 케어
양말은 일곱 켤레에 $180(약 20만원)이다. 6개월마다 새 양말을 주문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당뇨병 환자는 충분히 그 정도를 지불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3) 윌로우(Willow)
윌로우는 웨어러블 유축기로 가슴에 착용한 상태에서 다른 외부 장치 없이도 모유를 저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커다란 외부 장치가 딸려있었던 기존의 유축기와 달리, 윌로우는 가슴에 착용한 상태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며 외출 또한 가능하다. 특히 컴팩트한 크기 때문에 한 쪽 젖을 아기에게 물린 상태에서 다른 쪽 모유를 저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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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2 웨어러블 유축기 윌로우

스타터 킷의 가격은 $480(약 53만원)으로 저렴하지는 않다. 홈페이지에는 스타터 킷의 내용물(펌프 2개, 주머니 2개, 튜브 2개, 밀크백 24개 등)을 화분과 귤, 어항 등을 이용해 흥미로운 사진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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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3 윌로우 스타터킷의 내용물

4) 스파르탄

CES가 다른 전시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라면, 바로 신체를 부분적으로 노출해 사람들의 시선을 유도하는 부스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없지는 않다.) 그런 분위기에서 레깅즈 위에 속옷 하의를 입은 남자 몇몇이 지키고 있는 부스는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이들이 CES, 전자제품 전시회에 가지고 온 것은 바로 그 속옷 하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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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4 전자파보호 속옷 스파르탄
스마트폰의 전자파가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 그 해의 정도에 이견은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남성들의 정자 수 감소에 영향을 줄 가능성 또한 제기되고 있다. 스파르탄은 은섬유를 이용해 전자파의 99%를 차단한다고 말한다. 가격은 $34 (약 3만 7천원)로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비자가 이 속옷을 간절하게 입고 싶도록 만드는 마지막 1%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4. 디지털 vs 아날로그

2. 가격이 문제

서두에서 기술의 정의를 두고 에너지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기술인가라는 또다른 질문을 생각할 수 있고, 여기서 기술의 다른 한 가지 특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비용이다. 기술이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들어간 자원과 나온 자원의 비율을 통해 효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히 들어가는 것이 적을수록, 그리고 나오는 것이 많을수록 좋은 기술일 것이다. 이를 다시 비용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 질문의 답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같은 결과물을 만드는데 비용을 낮출 수 있는 기술이 좋은 기술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최종 결과물로써의 제품에는 이러한 수많은 기술이 들어가 있다. 그 제품의 가격은 그 제품에 들어간 기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곧, 기술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기술이라 하더라도, 가격의 문제로 그 제품을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 기술의 의미는 크게 퇴색될 것이다. 반대로 거의 비슷한 기술이라도 조금이라도 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된다면, 그 기술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오늘날 기업들은 늘 이러한 현실에 부딪히고 있다. 불과 몇 년 만에 우리는 비슷한 제품들을 가격 순으로 정렬해 한 화면에 보여주는 세상에 살게 되었고, 똑같은 제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낮은 가격에 내놓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곧 어떤 관점에서는 소비자천국이라 할 만한 승자독식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는 역으로, 남들보다 고지를 먼저 차지하게 만들어주는 신기술의 중요성을 높였다. 과거 모든 신기술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 등장하는 제품들의 가격은 고가로 시작해 점차 내려간다. 때로 너무 빨리 등장해, 곧 시장이 충분히 무르익지 못해 살아남지 못했던 제품들이 있으며, 반대로 이미 기술력이 충분했음에도 너무 늦게 나타나 시장 장악에 실패했거나 혹은 다음 세대의 기술에 먹혀버린 경우도 있다. 결국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가격으로, 그러면서도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원가보다 충분히 높은 가격으로 시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모든 기업의 숙명인 셈이다.

이번 꼭지에서는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되지만 아직 일반화되기에는 가격의 저항이 있을 수 있는 제품들을 골라 보았다.

1) 쉐이드크래프트(Shadecraft)의 선플라워(Sunflower)
아래 사진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제품은 비치 파라솔이다. 그러나 기존 파라솔과는 다르다. 기존의 파라솔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바로,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파라솔을 움직이거나, 아니면 사용자가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 파라솔은 그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는데, 바로 태양을 따라 파라솔이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제품의 이름 – 선플라워, 곧 해바라기 – 은 그 기능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모든 전자 제품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전원 문제를 태양 에너지로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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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3 쉐이드크래프트의 선플라워
태양 에너지가 이런 큰 파라솔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에너지가 나오는가의 의문이 들지만 이들은 실제 동작하는 제품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게다가 태양 에너지의 고질적 문제점인 구름으로 인한 불안정한 에너지 수급 문제도, 이 제품을 사용하는 지역은 모두 태양이 충분한 곳일테니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체 충전되는 배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응용을 상상하게 만든다. 전원이 없는 야외에서 전원을 공급해주는 장치라는 점에서 스마트폰 등의 전자제품 충전이나 야간 라이트, 방범 카메라, 온습도계, 전기해충퇴치기 등 수많은 제품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가격이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전자제품이라도 가격과 제품의 크기는 어느 정도 비례한다. 출시 예상가를 묻자 $5,200 (약 600만원) 이라고 답한다. 나는 바로, 월마트에서 $10 정도에 파는 파라솔을 떠올리며 그냥 파라솔보다 100배 정도 비싸군요라 말하고 관계자도 조금은 인정하는 듯이 웃는다. 하지만 역시 이러한 지적을 많이 받았다는 듯이 최고급 파라솔 중에는 더 비싼 (약 $6,000) 것도 있어요라고 답한다. 나도 인정한다. 결국 그 시장이다. 충분히 제대로 동작한다는 기본에 얼마나 외관을 고급스럽게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수명이 얼마나 될지가 중요할 것이다.

2) 런드로이드(Laundroid) vs 폴디메이트(Foldimate)
이 두 제품은 많은 것이 자동화된 집안일 영역에서 아직 남아있는 ‘귀찮은 일’인 빨래개기를 해결한다. 다음 코너인 3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스티븐 핑커는 빨래에 들어가는 시간이 1920년 주당 11.5시간에서 2014년 1.5시간으로 줄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변화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개선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빨래를 개는 영역은 아직 개선되지 않았으며 이 두 제품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단지 문제의 해결방식이 이 두 제품의 가격차이($16,000 vs $980)만큼 판이하다.

2-1) 런드로이드(Laundroid)
사실 이 제품은 작년에도 전시된 제품이다. 부쓰 자체를 하나의 발표회장으로 사용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일본의 세븐드리머스라는 로봇제조회사의 제품이며, 아래 서랍에 구겨진 옷을 넣으면 로봇이 옷을 하나씩 들어올려 인공지능으로 옷의 종류를 파악하고 그 옷에 맞게 옷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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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4 런드로이드 제품 소개장면

문제는 역시 가격이다. 한화로 약 1800만원 정도라는 가격을 들으면, 최저 시급을 받고 옷을 개주는 사람이 떠오르는 동시에 왠지 이 기계는 옷을 개는 것 뿐 아니라 벗어둔 옷을 모아서 빨래를 하고 말린 후에 개어서 옷장에 정리까지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담당자는 빨래와 건조를 위 로봇에 연결시킨 제품을 개발중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정도 일을 해준다고 해도, 일반 가정에서 이 제품을 구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량의 빨래가 필요한 호텔과 같은 사업장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이때는 정말로 실제 인간과의 비용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2-2) 폴디메이트(Foldimate)
CES 에는 웬만한 제품에 대해 경쟁제품이 존재한다. 다른 버전으로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도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성경에 나오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도 있겠다.

폴디메이트는 이스라엘의 스타트업으로 제품 이름이 곧 회사 이름이다. 이 제품 역시 빨래를 개지만 위의 런드로이드가 빨래를 맡긴 이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과 달리 아래 사진 에서 보는 것처럼 옷을 하나 하나 펼쳐서 기계에 넣어줘야 한다. 그러나 이 제품은 약 110만원($980)으로 위에 설명한 런드로이드와의 약 1/20 이며, 이 사실이 그 정도의 귀찮음은 곧 잊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제품이 빨래를 개는 시간을 정말 크게 줄여주는가 하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역시 런드로이드처럼, 일반 가정 보다는 수많은 빨래를 깔끔하게 접어야 하는 영업장에서 더 유용할 것 같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제품이 빨래를 얼마나 깔끔하게 일관적으로 접어내는가 하는 근본적인 성능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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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5폴디메이트
시제품은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판매예정시기는 2019년 말로 아직 많은 개선이 필요한듯 하다.

3) 유베카(Euveka)
유베카는 마네킹을 스마트하게 만든 제품이다. 마네킹의 일반적인 목적은 매장에서 옷을 디스플레이하는 것이지만 이 제품은 특별한 기능을 추가했다. 바로, 신체의 사이즈를 입력하면 마네킹이 부풀어올라 그 사이즈로 변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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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6 Thin and Fat

물론 문제는 가격으로 직원은 가격이 약 $4,000 (약 440만원)이 될 것이라 말한다. 선플라워와 비슷하게 시중 마네킹의 100배이다. 하지만 이 제품은 일반 매장용이 아니라 의류 디자이너 혹은 스포츠의류 개발업체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 CES 에서도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 혁신상(Innovation Award)을 주었다.

4) 코라빈(Coravin)
아래 제품은 모양만 보고서는 어떤 제품인지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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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7 코라빈
다음 사진이 이 제품의 용도를 말해준다. 바로, 와인 코르크위에 끼워 코르크를 따지 않고도 와인을 마실 수 있게 해준다. 그게 어떤 장점이 있을까? 이 제품이 해결하는 문제는 바로 와인을 한 번 따고나면 그 자리에서 다 마셔야만 하는 불편함이다. 곧, 코르크를 뽑지 않고 와인을 마시게 함으로써, 즉 한 병의 와인을 여러 번 마실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는 관으로 코르크마개에 구멍을 뚫고 아르곤 가스의 압력을 이용해 와인을 따라마시게 된다. 마시고 나서 기계를 뽑으면 코르크마개의 탄성에 의해 다시 밀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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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8 코라빈

가격은 기계만 $400(약 45만원)이며, 한 통에 와인 15잔을 먹을 수 있는 아르곤 캡슐은 개당 만원 꼴이다. 약간 비싼 가격으로 보이지만, 한 번에 마시는 술의 양이 줄고 있는 추세를 잘 반영하는 제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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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9 아마존의 와인스토퍼 검색결과

단지 이러한 수요를 해결하는 기존의 제품이 훨씬 더 저렴하다는 문제가 있다. 바로 와인 스토퍼(Wine stopper)로 알려진 제품들로, $10 내외의 많은 제품이 있으며 같은 가격에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와인이 상하는 것을 막는다는 배큐빈(Vacu vin)이라는 제품도 찾을 수 있다.

3. 아프고 약한 이들을 위해

1. 스마트란 무엇인가

스마트는 최근 인공지능 열풍에 힘입어 자사의 제품을 수식하는 가장 인기있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며 스마트의 용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공지능 열풍이 불기 이전의 것으로, ‘스마트폰’이라는 단어에서처럼, 하나의 기계가 원래의 목적 이외의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다른 하나는 최근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열풍 이후,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계가 어느 정도의 판단이나 선택을 인간을 대신해 내려주거나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경우이다.

물론 CES에 출품되는 거의 모든 제품은 어느 정도의 스마트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꼭지에 소개하는 제품들은 조금 더 특별한 스마트함을 자랑한다.

1) 미라(Mira) 스마트 임신테스트기
이 기기는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의미, 곧 데이터를 이용해 새로운 정보를 주는 제품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제품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임신테스트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단순한 제품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이다. 바로 임신이냐 아니냐는 것. 테스트기의 작동방식 또한 명확하다. 소변에서 호르몬을 검출해 특정 호르몬의 양을 바탕으로 한 줄 혹은 두 줄을 칠한다. 이런 명확한 목적과 작동방식을 가진 제품이 어떻게 스마트해질 수 있을까? 한 가지 힌트는 테스트기에서 검출하는 호르몬의 양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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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0 MIra, 테스트기와 충전기
1-1) 임신 전: 임신 가능 시기를 알려준다
미라는 원래 임신 전 상태의 여성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이다. 이 단계에서 제품의 역할은 명확하다. 곧 호르몬을 측정해 언제가 임신이 가능한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임신을 간절하게 원하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하고, 따라서 이 시장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매력적인 시장이다. 미라의 홈페이지에는 앱을 통해 임신 가능 시기를 알려준다고 되어 있다. 올해 2사분기에 출시할 예정이라 한다. 문제는 가격일 것이다. CES에서는 정보를 분석하는 리더기는 $200, 1회용 테스트기는 $10 내외라고 말했다. 주기를 알기 위해서는 측정을 어느 정도 자주해야겠지만, 정확도만 보장된다면 그 정도를 감수할 이들은 꽤 있을 것이다. 만약 임신 확률을 높여주는 다른 제품과 결합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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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1 임신가능시기 (출처: MIRA 홈페이지)
1-2) 임신 후: 출산 예정일을 알려준다
그럼, 임신에 성공한 부부에게, 성공 여부 외에 테스트기는 어떤 사실을 추가로 알려줄 수 있을까? 바로 출산예정일이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문제의 답이다.) 비슷한 원리로 임신이 된 시기 역시 알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데이터를 모으고 있고 CES에서 만난 직원은 대략 1년 뒤에 이 제품을 출시할 것이라 말했다. 물론 CES에서 1년 뒤에 출시한다는 이야기는 언제 출시할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임신 전을 위한 제품에 비해서는 사용 횟수가 떨어질 것 같지만, 임신 테스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정보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 밀리부(Miliboo) 스마트 카우치
이 제품은 스마트의 첫번째 의미, 곧 한 가지 제품이 다른 여러가지 기능을 갖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카우치(우리나라에서는 소파라 부른다)가 스마트 하다고 들었을 때 나는 좀 더 참신한 것을 기대했다. 예를 들어, 앉는 사람의 키나 자세에 따라 등받이와 엉덩이 부분의 형태가 바뀌거나 푹신한 정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면 어떨까? 혹은 안마 기능이 있다고 말했다면 조금 식상하다고는 느꼈겠지만 이 제품을 사고 싶은 마음은 더 커졌을 것이다. 물론 이런 기능들은 소파의 가격을 크게 올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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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2 밀리부 스마트 카우치
프랑스의 가구 브랜드인 밀리부의 스마트 카우치는 이런 예상을 깨고 전형적인 스마트폰 느낌의 스마트함을 이야기했다. 곧, 소파 안에는 우퍼를 포함한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어 더 실감나는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한쪽 팔걸이에는 만능 리모콘이 있어 TV와 다른 전자제품을 제어할 수 있다. 다른 쪽 팔걸이에는 무선충전장치가 내장되어 스마트폰 등을 충전할 수 있다. 전시장에 비치된 소파에 잠깐 앉아 보았지만, 소파 본연의 기능인 편안함은 큰 느낌이 없었다. 가격은 1인용 소파는 $2,490, 2인용, 3인용은 각각 $2,990, $3,490으로 가죽 소파 중에도 꽤 비싼 느낌이다.

3) 스파이어(Spire): Make Your Clothes Smart
옷을 스마트하게 만들겠다는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최근의 ‘스마트’ 흐름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태그를 브래지어, 속옷, 반바지, 파자마 등에 부착할 경우 호흡, 수면 질, 심박, 스트레스 등을 측정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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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3 스파이어
일반적으로 이런 제품의 가장 큰 문제는 배터리 충전이다. 이런 종류 중에는 애플워치 처럼 하루에 한 번 충전해야 하는 경우도 제법 있다. 손목 시계는 적어도 자기 전에 풀었다가 아침에 다시 찬다고 하지만, 이 제품처럼 옷에 부착하는 경우 고객이 이를 매번 충전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때문인지 이 제품은 따로 충전을 하지 않는 1회용으로 만들었다. 홈페이지에는 8개 세트의 경우 1년 반을 쓸 수 있다고 한다. 8개의 가격은 $299 이다.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제품을 꼭 사야할 무언가는 없어 보인다.

2. 가격이 문제

0. 들어가기: CES 는 어떻게 세상의 모든 제품을 전시하게 되었나

‘CES 는 세계 최대의 가전쇼입니다.’

CES 에 대한 여러 기사의 첫줄은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CES에 대한 이 단순한 설명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그렇게 힘들게 라스베가스를 찾아오는 지,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기사가 그 기간을 전후해 언론 지면을 장식하는 지 말해준다. 물론 가전이라는 단어는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비디오 등의 가전제품을 연상시키며 실제로 십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CES는 대체로 그런 종류의 제품들만 전시되던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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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가전제품들

그러나 오늘날, CES에는 자동차에서 스마트 칫솔까지 세상의 거의 모든 영역이 전시된다. 이 보고서는 ‘신비한 제품사전’이라는 이름처럼 바로 그 사실, 곧 CES에 전시되는 제품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러한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보자. 다시 말해, 전자공학은 어떻게 세상의 모든 제품이 자신을 사용하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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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2016년 CES 혁신상을 받은 제품들

물론 이는 간단한 질문이 아니다. 이 하나의 질문을 가지고도 마치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왜 어떤 대륙은 다른 대륙보다 느리게 발전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총, 균, 쇠”와 같은 두꺼운 책을 써 낸 것 비슷하게, 아니 그 못지 않은 분량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 전자공학과의 교과서 수 십 권을 바탕으로 더 자세한 설명을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위 질문의 답을 내 나름대로 아주 짧게 추측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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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 제라드 다이아몬드와 총, 균, 쇠

‘기술’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는 기술을 하나의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바꾸는 방법으로 정의해보자. 예를 들어 엔진은 연료가 가진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다. 에너지를 바꾸는 과정에서는 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며(곧, 재활용이 불가능한 열에너지로 바뀌며), 따라서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해, 출력되는 에너지의 양은 입력되는 에너지의 양보다 줄어들게 된다. 에너지의 종류에는 빛, 열, 소리, 운동, 화학 에너지 등이 있으며, 인간 또한 음식물이 가진 화학에너지를 체온 유지를 위한 열에너지와 이동을 위한 운동에너지, 의사소통을 위한 소리에너지 등으로 바꾸는 기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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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에너지의 여러 형태

중요한 것은 전기 에너지가 이런 에너지들 중에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선 전기 에너지는 전선이 연결 가능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즉, 전기 에너지는 쉽게 전달할 수 있다. 전기의 발명 이전에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집을 덥히기 위해 산에서 땔감(화학에너지가 저장된 연료)을 가져와야 했고, 수력 에너지를 이용하는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전기는 언제 어디서나 전선만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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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전기 에너지

전기 에너지의 또다른 특징은 전기 에너지와 다른 에너지 사이의 변환이 매우 쉽다는 점이다. 에디슨의 전구는 전기 에너지를 빛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며 인류를 어둠에서 해방시켰다. 전동기(모터)는 전기를 동력으로, 곧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다. 한편 운동에너지를 전기로 바꾸는 발전기는 다른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쉽게 바꿀 수 있게 해준다. 화학, 수력, 원자력 발전소는 모두 물질이 가진 화학 에너지, 위치 에너지, 원자력 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 후 다시 전기 에너지로 바꾸어 도시로 이를 전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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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6 발전소

물론 전기에도 단점은 있다. 자동차나 배, 항공기처럼 전선을 연결할 수 없는 상황이 그러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때문에 이들은 화학에너지가 담긴 연료, 곧 석유 등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왔다. 또한, 우리가 지니고 다녀야하는 휴대품은 전기를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배터리를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의 배터리를 충전하면서 그 불편함을 악히 잘 알고 있듯이, 아직 배터리 기술은 충분히 편리하지 않다. 그러나 이 배터리 기술 역시 점차 발전하고 있으며, 배터리를 이용해 전기 에너지를 바로 사용하는 전기자동차의 등장이 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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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7 전기자동차 이미지

이런 에너지원으로써 전기가 가진 장점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가전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큰 기술적 발전이 뒤따른다. 바로 전자공학이라는, 전기를 정보의 처리에 사용하는 기술이다.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를 넘어 집적회로가 등장했고, 전자의 이동을 통해 계산, 곧 정보를 가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미묘한 전기 혹은 전파의 변화를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 기술의 발달은 정보가 담긴 신호를 공간적 한계 없이 빛의 속도로 전달할 수 있게 되어 세상의 변화속도는 과거와는 비교불가능하게 바뀌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무선통신이 등장했으며, 드디어 스마트폰이 나타나 모든 인간은 연결되었다. 그리고 IoT에 의해 모든 사물이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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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8 스마트폰과 IoT (출처: 파이낸셜뉴스)

곧, 전기 에너지의 특수성, 그리고 전기를 이용한 정보처리 기술의 발달의 두 가지가 바로 전자공학이 세상을 장악하게된 핵심적 이유이며, 오늘날 CES가 세상의 모든 제품을 망라하게된 이유인 것이다.

필자는 지난 CES 기간 나흘 동안 50km 이상을 걸으며 수천 여 제품을 보았고 인상적인 150여 개의 제품을 담은 뒤 여러가지 분류의 기준을 생각한 끝에 아래와 같은 9개의 꼭지로 나누었다. 각 장은 독립적이며, 분류의 의미를 설명한 부분과 여기에 해당하는 몇 개의 흥미로운 제품을 소개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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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9 Pedometer 앱이 알려준 보행거리

1. 스마트란 무엇인가
2. 가격이 문제
3. 아프고 약한 이들을 위해
4. 디지털 vs 아날로그
5. 같은 문제, 다른 해결
6. 같은 기술, 다른 용도
7. 모바일과 UI
8. 가방아 가방아
9. 잠을 잘 자는 방법

호모데우스를 읽고

호모데우스 – 유발 하라리

아직 호모데우스의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작인 사피엔스를 읽고 그가 흔한 베스트셀러 저자가 아님은 눈치챘지만 이렇게 내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십 년 이상 내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불편을, 하라리는 너무나 쉬운 방법으로 해결한다. 내가 감히 시도하지도 못했던 답이지만, 받아들이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 오히려 그간의 내 소심함만을 탓하게 될 뿐이다.

호모데우스를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인류는 아래 도식과 같은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 —> 인본주의(자유주의) —> 과학

이 도식 자체는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호모데우스 역시 전작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을 잘 엮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대부분의 그가 이야기하는 사례들이 이미 알던 것들이며, 책의 후반부 어느 시점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안고 있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세계관의 변화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내 세계관의 변화 또한 위의 도식과 매우 비슷한 흐름을 겪었다는 것이다.

1996년 겨울에서 97년 여름까지의 기간은 내 삶에서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나는 이 시기 내게 매우 큰 지적 영향을 끼치게 된 두 권의 책을 만난다.

나는 독실한 부모님과 친척 다수가 목회자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자연스레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으며, 가능한한 종교가 가진 긍정적 의미를 찾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창조과학 같은 과학에 대한 명백한 부정에 대해서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맹목적인 이들의 자기만족 정도로 치부하며, 한 번씩 다가오는 근본적 의문 역시, 내가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한 그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입시가 끝나 다소간의 여유가 있었고, 겨울 방학 동안 도서관 4층의 교양과학 서가에 꽂힌 책들을 모두 읽으려는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에는 책꽂이로 서너 열 정도로 그렇게 책이 많지는 않았다. 보이는 대로 몇 권을 읽어나가던 중 내 손에 잡힌 것이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찾기 힘든, 노란색 표지의 문고판으로 기억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뚜렷한 목적이나 사전지식을 가지고 책을 읽기 보다는 그저 눈에 뜨이는 대로 읽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그저 특이한 제목의 책이라 생각하며 나는 책을 읽어 나갔다.

인생은 한 번씩 아무런 예고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이기적 유전자’ 또한 그랬다.

어느 글에서인가,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어린시절의 사건으로 유년기에 시작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에 대해 쓴 일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명령은 일종의 행동 강령처럼 내 소년기를 지배했다. 이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거나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결국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처한다면?’이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이며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에 대한 이해, 곧 나는 왜 이렇게 느끼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나는 심리학 책들을 계속 찾아다니며 읽었다. 애런슨의 ‘사회심리학’, 치얼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등은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기적 유전자’가 이런 질문, 곧 나의 느낌과 나의 욕망에 대해 왜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왜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는 환상적인 프레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얼마 뒤 출판된 조지 윌리암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에서 이 표현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육체적 특징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규칙을 따라 진화해왔다면 정신적 특징 또한 그러지 않았어야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의 모든 호오와 무관심, 열정과 혐오, 심지어 지식에 대한 이끌림까지도 그 뿌리에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미생물에서 출발한 극히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원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진화심리학의 첫 만남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화심리학을 21세기의 ToE(Theory of Everything: 물리학에서 유래한, 모든 것의 이론)이라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왜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진화심리학은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설명력은 이론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어도, 진화심리학은 너는 특별하지 않다, 너는 생물학적 존재다, 너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의 사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진화론의 단점은 설명은 매우 그럴듯하게 해줄 망정,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다음 20여년을 보다 실질적으로 지배한 사상은 다른 하나의 책, 아니 사람을 만나면서 접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고등학교 친구들과 같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나는 한 친구가 가져온 책 한 권을 만난다. 그 책이 바로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 계간지였다. 나는 민박집에서 그 책을 다 읽은 뒤 학교로 돌아와 전월호들과 그의 다른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자연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여러 조류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접한 것이 인본주의, 특히 자유주의였다.

강준만 교수 외에도, 당시는 그런 사회적 필요와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자유주의 논객들에 의한 계몽의 시대로 누군가는 기억할 수도 있다. 홍세화, 고종석, 진중권, 김규항 등 지금도 여전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의 책을 나는 나오는대로 읽었다. 결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이들이 기본적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에 부족했던 인본주의와 특히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전파했다는데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시 그렇게 책을 탐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내 존재에서 목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조기교육의 문제점을 주장하는 글에 전형적인 예로 등장했을 만한 이였을 수도 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대학원생의 본분은 연구였지만, 나는 친구들을 따라 시험을 치고, 친구들을 따라 상급학교로 계속 진학했을 뿐, 본분이나 그 목적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형식 만을 겨우 흉내내고 있었다. 늘 해야할 일과 나를 분리하려 했으며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 자신을 찾는, 그런 크게 뒤늦은 무책임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방황 혹은 거리두기에서 오는 공허함을 나는 책에서 찾았고 책은 나름의 보상을 주며 나를 더 책 속으로 이끌었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을 게임에 썼다. 게임에 대해서도 앞으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부정적으로! 하지만 적어도 그런 공허함을 채워주는 데는 더없이 유용했다는 점을 포함해.) 그렇게 97년 즈음부터 2004년 박사를 받고 3년 반의 에트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2007년 까지 10년 동안 매년 10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게 20년 전,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나는 서서히 종교의 영향을 벗어나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내 정체성을 과학자에서 찾아 왔기에, 나는 내가 종교로부터 독립하게 된 계기를 그 정체성, 곧 과학의 힘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쓰나미처럼 내 정신의 세계로 밀려와 방사능처럼 침투했다.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하며, 그리고 솔깃하다 못해 자극적인가!

특히 과학과 달리 자유주의는 행동원칙을 정해 주었다. 당위를 주었고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 전까지 나를 옥죄던 모든 구습과 구태,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상대에 대해 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기위해 그 이유를 힘들게 찾아야했던 어려움을 나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쉽게 벗어던지고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당대의 난제들을 손쉽게 해결하는 듯 보였다. 동성애, 안락사, 성매매, 간통 등의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린 알렉산더의 칼처럼 명쾌한 답을 주었다.

물론 자유주의가 어쩌지 못하는 경계는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자살? 본인의 선택이 아닌가? 한가지 어정쩡한 답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어정쩡하다. 주변 사람들이 받는 피해의 종류는 물질적 피해에서 정신적 슬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당사자가 내린 결단의 힘에 어찌 비할까? 그래서 누군가는 자살만이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 하지 않았을까?

자유주의가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과학은 자살에 대해 훨씬 더 효율적인, 그러나 경박한 답을 준다. 자살은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이다. 약을 먹고 고쳐라! 사람들은 이런 처방이 가진 독성을 눈치채지만 다른 방도 없이 이를 받아들일 뿐이다. 물론 과학의 장난은 끝이 없다. 인간은 때로 고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한다. 진화심리학은 교묘하게 이 희생의 가치를 유전자로 환산한다. 당신이 목숨을 버려 자식을 살려야 한다면, 한 명은 손해, 두 명은 쌤쌤, 세 명은 이득이다!

문제는 끝이 없다. 마약은? 혼자 골방에서 하는 마약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마리화나에 대해서는 적어도 승리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큰 쾌락을 줄 수 있는 약들은 어떤 원리로 막아야 하는가? 수간은 또 어떠한가? 양들이 침묵하는 일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마약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막아보자. (그렇다면 사회의 유지가 개인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 물론 현실적으로 당연히 그렇다. 국가는 이를 등에 없고 개인을 감시하고 불순분자를 제거한다. 그리고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수간은 동물권이라는 (육식의 종말?) 일종의 인본주의의 확장을 통한 답이 있다. (적어도 수간으로 채우려는 욕망이 저급한 욕망이라는 도덕적인 답이 마음에 든다면, 사회를 다시 신정의 시대로 retro!)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동물권에 대해,(특히 육식에 대해) 기독교는 일찌감치 창세기에서 이미 인간을 만물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문제의 싹을 잘라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살생을 금한 불교는 유발 하라리가 거듭 호감을 표하듯 특이하다.)

물론 여기서 과학은 또다시 장난을 계속한다. 사실상 인간이 타인의 수간에 혐오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동물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동물에 대한 사랑을 철저하게 분해한다. (물론 수간 역시 동물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인간이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이유 중에는 역사적으로 더 귀여운 반려 동물이 더 높은 값을 받고 더 많이 팔림으로써 인간의 개입에 의한 품종의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있다. (얼마나 시장주의적 기원인지. 물론 이 이야기의 의미는 당신이 당신의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의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의 장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동물에 대한 사랑을 인간이 인간의 아기에 대해 가지도록 만들어진 애착(큰 눈, 몸집에 비해 큰 머리 등)에 의한 일종의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로렌츠). 심지어 동물을 귀엽게 느끼도록 만드는 기생충(톡소플라즈마)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이것은 너의 자유가 아니라는 뜻.)

어쨌든 자유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원칙 – 원하는 대로! 피해는 금물! – 에서 양쪽에서 다가왔다. 먼저 등장한 것은 ‘피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육체적, 물질적, 객관적 피해만이 주요한 피해로 여겨졌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정신적, 관념적, 주관적 피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역시 처음에는 합리적인듯 보였다. 내 기분이 나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를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누군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황에서, 누구의 기분도 나쁘지 않아야 한다는 구호는 얼마나 형식적이고 공허한가! (패러독스의 아버지 러셀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그렇게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원하는’ 이라는 단어에서 나타났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독립성과 욕망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개인의 욕망이 거시적으로는 진화의 산물임을, 미시적으로는 화학물질의 영향임을 밝혀내고 있었다. (한편, 잡스와 같은 선지자가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다’는 테제를 내세운 것은 흥미롭다.) 진화심리학은 지금 당신이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과거 당신 조상의 생존(과 번식)에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바로 그러한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당신에게 이득이다. 나는 ‘가장 소중한’ 나의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누가 인간의 본능을 더 자극하고, 누가 대중을 더 잘 속이느냐에 따라 보상을 준다. 속임수는 진화의 주요 메커니즘이고, 종교와 자유주의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다.)

어쨌든 자유주의라는 개인적 원칙을 사회적 원칙으로 확장하기위해서는 다수의 욕망과 피해를 조율할 수 있도록 근본적 수선이 필요했다. 그것이 공리주의다. 사회적 원칙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효용을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효용 – 이익과 피해 – 과 타인의 효용을 비교해야 했다. 그것이 돈으로 치환가능한 물질의 한계를 벗어날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계산하고 비교해야할까? 한 가지 문제는, 위의 자살의 경우에서 보았던 것처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피해를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결과적으로 다수결)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의 여러 문제가, 이들이 명백하게 과학의 발전에 따라 더욱 드러나고 부각되고 있는 것임에도, 이 공리주의의 문제는 과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분법을 연속적인 변수로 만드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며, 사실상 전문영역이다. 정신적 만족과 피해를 양화(quantize)하기 위해 최신 뇌과학 기술 곧, 호르몬의 양, 뇌 신경의 흥분 정도, 뇌 신경의 구조적 특성 등을 이용해 어떤 척도(measure)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규칙이 사회 구성원 앙상블의 행동, 생각, 환경의 변화를 만들고 이것이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미치는 쾌감과 비감을 종합한 효용의 크기를 양적으로 환산하면 문제는 풀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를 우회해 사회 전체의 효용을 최대화 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훨씬 빠르게 진군하는 과학의 승전보들에 비하면 미봉책일 뿐이다.

호모데우스를 읽기 전 마지막 단계로, 나는 자유의지의 문제에 빠져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생각했다. 사실상 자유의지의 문제는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이미 결정이 난 문제이다. 단지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만이 아니라 쥐와 물고기를 거쳐 단세포 생물까지 올라간다. 생각하는 나, 선택하는 나는 환상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진화론이 아니어도 라플라스적 세계관(결정론), 곧 물리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미래라는 개념으로 자유의지의 부재를 미리 의심할 수 있다. 이를 미시적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당신의 모든 생각과 욕망은 (의학과 생물학 이 말하듯이) 뇌의 신경세포의 활성화에 따라 정해지며, 뇌 신경세포의 활성화는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곧 철저한 인과관계, 가장 아름다운 물리법칙으로 꼽히는 맥스웰 방정식을 따르는 전자들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유의지 문제에 결정론 vs. 우연이라는 또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결정론은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잠깐 흔들렸으나, 다시 물리학자들의 합의를 얻어가고 있다. 한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의 블로그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에서 결정론을 지지하는 이의 비율은 30% 정도였다. 결정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양자역학이 세상을 묘사하는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결정론이건 우연이건, 자유의지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없다”는 위에서 제공한 논리들 외에 또다른 논리를 추가한다. 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원리, 바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를 이용한다. 곧, 당신이 무언가를 원하게 되었을 때,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마음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 마음은 당신의 의식에도 (당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나타났을 뿐이다. 위의 미시적 관점을 따르면, 뇌의 특정한 회로가 특정한 환경 조건 – 혈당이 떨어졌다 – 에 의해 특정한 신호 – 배가 고프다 – 를 당신의 의식에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로봇청소기가 배터리가 부족할 때 충전기로 찾아가는 것과 하나도 다를바 없다. 샘 해리스는 뒤이어 쇼펜하워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할 지는 정할 수 없다.” 자기가 무엇을 원할 지를 정할 수 있다면 인간사의 그 무수한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 텔레비전, 영화도 재미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고 내재화 하면서도 나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자유주의를 계속 조금씩 비틀어 과학의 진보에 끼워 맞추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호모데우스를 읽는다. 결국 나의 문제는 하나였다. 자유주의(인본주의)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세계관은 동시에 만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명확하다.

하라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 선구자들을 비웃는다.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 그밖에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자유주의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백 페이지에 걸친 박식한 논증으로 자아와 자유의지를 해체한 뒤, 숨이 막힐 듯 놀라운 지적 공중제비를 넘어, 마치 진화생물학과 뇌 과학의 모든 경이로운 발견들은 로크, 루소, 토마스 제퍼슨의 윤리적/정치 이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18세기에 착지한다.” P.419 “호모데우스, 김영사”

그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면!)

이것이 내가 서두에 말한 충격이다. 서두의 도식에서 본 것처럼, 인본주의를 버려야 한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물론 인본주의를 버린다는 것이 당장 인명을 경시한다거나 타인의 자유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그리고 공리주의)는 여전히 타인의 존중을 받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유용하다. 하라리는 이를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가 아닌 제 3의 실재, 곧 상호주관적 실재라고 표현한다. (전작 사피엔스에서 돈, 종교, 국가 등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사용한 개념이다.) 단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주춧돌 역할을 했던 이 사상에 대해 그 주춧돌을 꺼낸 다음 그 아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수렵채집인들에게 수렵채집 생활을 버리고 농경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했을 것처럼,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를 통해 거듭, 농경생활을 시작해 인간은 더 불행해졌다고 말하는 듯 하다. 수렵채집인 개인은 가능한 최대한 수렵채집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본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주장이다. 단지 수렵채집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농경생활이 자리잡은 것처럼, 인본주의 또한 그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이다.

자유의지는 없다. 이것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받아들인 것이고, 진화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쌓일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결정론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곧 미래는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정되어 있었다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자 하나하나 조차도 최초의 빅뱅 순간에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적어도 다른 그 어떤 대안들에 비해서 보다는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결정되어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것은 물리학의 문제일 뿐이다.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의 의지나 선택이 들어갈 여지는 없으며, 그저 우연성(randomness)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거시 세계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실 – 자유의지의 부재 – 가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자세에 영향을 주어야할 이유는 없다. 그저 모든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일희일비의 번뇌에서 우리를 한 발 더 떨어뜨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자유주의 또한 근거를 잃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라리는 다시 교묘한 출구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말한 상호주관성에 의해, 자유주의는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단지 수렵 채집인이 농경인에게 밀려나듯이, 자유주의 또한 그런 신세를 면치 못하게되리라는 것 뿐이다. 수렵 채집인은 수렵 채집이 가능한 환경이 존재하는 한 농경인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같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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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한 가지.

뉴스페퍼민트라는 외신을 번역하는 서비스를 5년째 하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막연히 누군가는 내가 재미있어 할 내용을 재미있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동안 나름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왜 인간은 뉴스를 좋아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뉴스에 그렇게 수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또다시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뉴스를 좋아하는 것이 뉴스가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형적인 ‘오래된 연장통’의 논리를 부른다. 비만이나 포르노 중독과 같은 현대병이 인간이 현대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부작용인것처럼 뉴스 중독 – 페이스북도 물론 –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뉴스를 만드는 것은 사회적 비효율에 일조하는 행위가 된다! (당연히 이는 극도의 단순화이다.)

또다른 뉴스페퍼민트의 문제는 비록 근본 철학으로 ‘언어의 장벽을 없앤다’라는 측면과, 뉴스페퍼민트의 기사를 가능한한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정보의 공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인해 몇몇 언론과 힘들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본질적 가치인 정보의 공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의 마지막 장에서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종교로 데이터교를 이야기하며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데이터교의 지고한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정보를 흐르게 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이며 정보의 자유는 “미국이 소련보다 더 빨리 성장하게, 미국인이 이란인이나 나이지리아 인보다 더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게(P.526)” 만들어주는 절대적 가치라 그는 말한다. 즉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사회에 이롭다. 또한 “정보가 자유롭게 유포될 권리는 인간이 정보를 소유하고 그 흐름을 제안할 권리보다 우선(P.524)”한다고 말한다.

호모데우스 식으로 말하자면, ‘뉴스 본능’은 인본주의의 기준으로는 개인의 후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호모데우스는 정보를 찾고, 소화하고, 전달하는 ‘뉴스본능’이 인본주의보다 더 강력하며 더 오래 살아남을 것임을 말하는 셈이다.

[2016.11.07] 과학자의 다이어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1108029006

다이어트는 자기계발이라는 21세기 신흥 종교의 핵심 교리다. 이 교리의 특징은 외모라는 일상의 권력기준에서 동력을 얻지만, 건강이라는 이 시대 또다른 진리의 절대적 지지를 동시에 받는다는 점이다. 비록 시대에 따라 선호되는 체형이 변한 것처럼 변화의 여지는 있을지라도, 값싼 풍요가 만든 비만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며, 따라서 앞으로도 이 교리의 위세는 약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이어트의 가장 손쉬운 기준으로 쓰이는 것은 한 인간의 물적량을 숫자 하나로 환원시킨 몸무게라는 값이다. 키라는 또다른 인간의 특징을 제곱해 앞서의 몸무게를 이 결과로 나눔으로써, 우리는 키에 관계없이 비만을 판단할 수 있는 체질량지수(BMI)를 얻는다. 물론, 성인의 경우 키는 크게 변하지 않으므로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체중 변화를 수시로 측정해 이를 실천의 동기로 삼는다. 이렇게 자신의 체중을 재는 방법은 실제로 효용이 증명된 매우 드문 다이어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체중의 변화를 지배하는 첫 번째 원칙은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간단히 말해 어떤 대상이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겪더라도 변화의 전후로 그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우유 팩 하나를 들고 체중계 위에 올라선 당신이 우유를 다 마시는 동안 체중계의 수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유 팩 하나는 200ml 이고, 액체의 비중은 대체로 1에 가까우므로 우유가 팩 안에서 당신의 위로 옮겨오는 동안 당신의 체중은 200g 이 늘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은 간단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체중을 증가시키고 몸에서 나오는 것은 체중을 감소시킨다. 평소 체중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만큼의 무언가가 몸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밥 한 공기는 100g 정도이고 한 사람의 식사량은 수백 g 안팍으로, 보통 물과 음료를 포함한 2-3 kg 정도가 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간다.

몸에서 나오는 것은 고체와 액체의 두 가지 형태를 가진다. 고체는 크기에 따라 한 번에 100-300g 정도이며 액체는 하루에 1-2 kg 에 이른다. 나머지는 피부 표면을 통해 증발하는 체액으로 매 시간 수십 g 이 빠져나간다. 밤 사이 줄어든 체중은 이때문이다. 어쨌든 질량보존의 법칙은 매우 단순한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데,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면, 체중은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이해했다면, 다음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에너지는 곧 열이며, 다이어트의 세계에서는 열의 단위인 칼로리가 쓰인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이는 음식을 통해 섭취할 수 밖에 없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질량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몸에 들어온 에너지에서 우리가 사용한 에너지를 빼고 나면 남은 만큼이 우리 몸에 축적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활동은 체온 유지로, 전체 소비의 절반 이상이 여기에 쓰인다. 물론 외부 기온, 활동량, 땀을 통한 체온 조절 등 다양한 변수가 있다. 그리고 뇌신경의 전기적 활동, 근육의 육체적 활동, 소화를 위한 내장기관의 활동에도 에너지는 소모된다. 운동은 건강한 삶의 유지에 꼭 필요하지만, 다이어트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들이 최근 발표되고 있다.

결국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적게 먹어야 한다. 다이어트가 필요해진 이유는 현대의 인간이 먹을 것이 부족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먹어두는 것이 유리했던 시대에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그들이 또한 우리에게 물려준 이성을 사용해 적절한 시점에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 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짜장면이 나오면 아이들은 중국집에 가자고 말하고, 치킨이 나오면 치킨을 주문하자고 말한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애들아, 저런걸 간접광고(PPL)라고 한단다.”

[2016.09.26] 한 시간의 가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927029006

빌 게이츠는 길에 떨어진 100달러의 지폐를 주울 필요가 있을까?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국내에 잘 알려진 하버드의 샌델 교수가 수업 중 빌 게이츠의 재산에 대해 이야기하며 던진 질문이다. 그는 빌 게이츠가 초당 150달러를 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시간을 들여 그 100 달러를 주울 가치가 없을 것이라 약간의 농을 섞어 말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 진지하게 답하는 이들은 그가 돈을 줍는다고 해서 다른 수입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가 100 달러를 줍는 것이 합리적이라 말한다. 이를 반박하는 이들은, 그가 돈을 줍는 동안 그렇지 않았다면 할 수 있었던 일을 못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그에게 합리적 행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빌 게이츠 본인은 한 인터넷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기꺼이 줍겠다고 말했다 한다.

샌델이 처음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빌 게이츠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를 조금 바꾸면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즉, 당신이 가진 시간의 가치를 어떤 행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빌 게이츠가 아니기 때문에 1초가 아니라 한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이를 각자가 가진 한 시간의 가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한 시간의 가치는 어느 정도 일까? 한 달에 20일, 하루 8시간을 근무한다면 한 달 근무 시간은 160 시간이며 따라서 한 달에 160만 원을 받는 사람의 시급은 만 원이 된다. 320만 원은 2만 원이다. 연봉 1억인 사람은 실수령액 기준으로 시급 4만 원 쯤 된다. 대부분 사람들의 한 시간은 이 정도 가치를 가질 것이다.

부업은 연봉이 아니라 시급이 직접 기준이 된다. 편의점, 커피숍, 프랜차이즈 등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최저 시급인 6,030 원을 받거나 조금 더 받는다. 몇 십 년째 금액이 바뀌지 않는다는 과외는 인기있는 아르바이트 자리이지만, 일 주일에 두 시간 씩, 두 번 일해 월 30만 원을 받는다면 시급은 2만 원이 조금 못된다. 최저 시급에 비하면 충분히 높지만 이동시간과 시간적 제약을 고려하면 큰 차이는 아닐 것이다.

반면, 시간으로 비용을 산정해 훨씬 높은 값을 받는 직업도 있다. 간헐적으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하는 전문가가 여기에 속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예술가, 모델, 동시 통역가나 후자에 해당하는 변호사, 변리사는 모두 시간 당 수십만 원을 받는다.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강사들의 강연비도 보통 수십만 원 선에서 결정된다. 물론 이들의 한 시간에는 수십 시간의 준비가 녹아있을 것이다.

전문가나 강사가 책을 내거나 방송에 출연하면 가치는 올라간다. 때로 몇 배로 뛰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몸값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연예인에게도 쓰이는 표현이다. 누군가를 행사에 한 번 초청하는데 수천만 원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인터넷 가십란을 종종 장식한다. 그 사람의 수입이 그 사람의 몸값이 되는 분야가 하나 더 있다. 보험업계에서는 사고로 인한 보상금을 그가 미래에 벌 수 있었을 수입에 바탕해 계산한다.

물론, 자유시장에서 거래는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밀턴의 말처럼, 이들의 가치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더 잘생기고 더 예쁜, 더 똑똑한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저녁시간을 차지하게 만든,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전자공학과 통신기술의 발달을 빼놓을 수 없다.

기술은 지금도 직업 시장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1~20년 내에 인공지능과 로봇은 직업 시장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술 발달이 사람들의 근무시간을 늘려왔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들을 대신해 일하게 되면, 처음으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 아빠에게 한 시간에 얼마를 버는 지 물은 뒤, 바쁜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아이가 커버리기 전의 시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를 가지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