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08] 합리적 인간은 숫자에 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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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은 합리적 판단을 필요로 하며 합리적 판단은 정보에 의존한다. 정보는 사실과 숫자로 이루어지므로 인생에 등장하는 수많은 숫자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합리적 판단의 시작일 것이다.

선택은 대안을 비교하는 것이며, 비교는 기준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이 기준으로 가장 유용한 것 중 하나가 돈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시간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일상의 대부분을 투자하며 그 돈으로 다른 필요한 것들을 구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과 돈의 교환비율, 곧 나의 시급일 것이다. 예를 들어 면도 시간을 아껴주는 제모수술이 있다. 나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면도를 하며, 한 번에 3분을 사용한다. 수술 비용은 100만 원 정도이며 1-2년 뒤에 다시 자란다고 한다. 1년 반이면 800분, 약 13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병원을 몇 차례 방문하는 시간을 제 해야 하므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 수술을 받는 것은 아직 내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것이다.

합리적 판단은 오랜 이상이자 목표였다. 이를 위해 습관적으로 모든 것을 숫자로 바꾸었다. 이런 습관은 기상과 함께 시작된다. 5만 원 쯤 하는 셔츠 하나를 평균 100 번 정도 입는다. 따라서 감가상각은 500원이다. 세 번 입을 때마다 세탁비 천 원을 써야 하므로 셔츠의 하루 비용은 800원이다. (오늘 처음 입은 셔츠에 음식을 흘리면 700원을 낭비한 것이다.) 바지도 셔츠와 비슷하며, 속옷과 양말을 더하면 하루 이천 원 쯤 될 것이다. 자켓 혹은 외투는 신중히 골라야 한다. 기십만 원 짜리를 100번을 입어야 몇 천 원 대로 떨어진다.

손목에는 스마트 워치가 있다. 1 년이 지났고, 2-3 년은 더 쓸 생각이니 하루에 500원 쯤 된다.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두고도 메시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두는 발걸음을 즐겁게 만드는 중요한 장비다. 몇 켤레를 번갈아 신고 있으며 켤레 당 500 번 쯤은 신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꽤 좋은 구두도 하루 천 원 안 쪽으로 신을 수 있다. 벨트는 더 저렴하다.

이런 방식으로 물건에 대한 판단을 섬세하게 만들 수 있다. 10년 정도 쓴 지갑을 작년에 바꾸었다. 지갑은 늘 손에 들고 다니며 종종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물건이다. 10년 동안 매일 쓴다는 것은 상당한 고급 지갑도 하루에 겨우 일이백 원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물론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스마트폰은 통신비를 포함해 대략 2년 동안 260만 원 정도가 든다. 2년 뒤 중고로 팔 수 있으므로 하루에 3천원 꼴이다. 다른 물건에 비해 비싸지만, 함께 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위의 모든 비용을 더해도 하루 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문밖을 나서기 위한 비용이 될 것이다.

출근에는 자가용을 이용한다. 아직은 감가상각이 0인 낡은 차를 타고 있다. 기름 값은 한 달에 20만 원 안팍이지만 보험 및 수리비를 합하면 하루에 만 원이 좀 넘을 것이다. 새 차로 바꾸게 되면 감가상각만으로도 하루에 만 원쯤이 추가될 것이다. 자동차가 비싼 물건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하지만, 다른 수단을 이용하더라도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이동, 곧 누군가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기 위한 물리적 움직임 자체가 비싼 것이다. 2014년 미국 전체 에너지 소모량 중 28%가 이동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점심과 저녁으로 1~2만원을 쓴다. 의보다 식이 비싸다. 그리고 집이 있다. 월세든, 전세든, 자가이든, 집 값의 변동이 없다면 대부분의 한국인 가정은 집의 크기에 따라 하루 몇 만원을 집에 쓰는 셈일 것이다. 식보다 주가 비싸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비용이다.

일이란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있고 미래에 돈이 될 수 있는 일도 있다. 후자를 자신에게 하는 투자라고 말한다. 어떤 물건들은 돈으로 시간을 바꿔주기도 한다. 세탁기나 식기세척기가 잘 알려진 예일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돈과 시간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즐겁게 놀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쓴다. 건강과 사랑도 중요하다. 이들 역시 어느 정도는 돈과 시간으로 얻을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좋은 비율로 구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2016.07.19] “쌤통의 심리학”

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심리가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이런 감정 나타내는 단어까지 있지요. 바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을 나타냅니다. 현암사가 2015년 12월 출간한 “쌤통의 심리학(The Joy of Pain)”은 바로 이 감정에 관한 책입니다. 저자 리차드 스미스 박사는 이 감정의 전문가입니다. 그의 전작은 샤덴프로이데의 사촌 격인 질투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스미스 박사는 이 책에서 샤덴프로이데가 비록 비뚤어진 감정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감정이 사회적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기 위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자 하는 ‘사회적 비교’ 습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원숭이와 개 역시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이 습성이 우리 내부의 매우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증거라고 그는 말해줍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서평은 작가 쉐릴 스트레이드의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선택받고,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는 말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보다 더 선택받고, 사랑받고, 존중받는 누군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추락하기를 바라며 이것이 바로 샤덴프로이트의 원인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미스 박사가 드는 예에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브누아 모닌은 바로 이 감정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채식주의자는 그 존재만으로 그렇지 않은 이들을 도덕적으로 주눅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였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채식주의자들은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위협을 느낍니다.” 채식주의자들의 위선이 밝혀질 때 다른 사람들이 느낀 위협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따라서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반대로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샤덴프로이데가 일상에서 보다 쉽게 드러나는 예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유명인의 추락을 즐길 때입니다. 스미스 박사는 타블로이드 잡지가 바로 그런 샤덴프로이데가 작동하는 예로 듭니다. 대표적인 타블로이드 잡지인 내셔널 인콰이어러지를 분석한 결과, 유명인의 지위가 높을 수록 그들에 관한 기사는 그들의 불행에 관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스미스 박사는 결론으로 샤덴프로이데를 “사악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우리의 어두운 면을 즐겁게 해주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수동적인 방관자의 관점에서 이것을 즐기는 한, 샤덴프로이데는 우리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도 우리와 같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스미스 박사가 예로 드는 것은 마사 스튜어트의 곤경이나 타이거 우즈의 몰락과 같이 미국의 예이지만, 저는 이 샤덴프로이데가 우리나라에 더욱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연예인의 무지나 추문에 유독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는 데에는 이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이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스미스 박사의 말처럼 이 감정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피상적인 평등이 확장될수록 샤덴프로이데에 기반한 사회적 동요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잘못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실제적인 사회적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 그저 진화적으로 장착된 감정의 소모로 끝나고 마는 것일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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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아이돌〉은 출연자의 굴욕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한 예에 불과하다. 미디어 학자인 앰버 와츠의 분석에 따르면, 출연자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러 장치들로 시청자를 유혹하는 리얼리티 포맷의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났다. 텔레비전을 많이 보지 않는 사람일수록 분명히 느끼겠지만,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나온다. 또 다른 미디어 학자인 세라 부커와 브래드 웨이트는 각본 있는 드라마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자들의 굴욕적인 모습이 더 많이 나온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그들은 이런 경향에 ‘휴밀리테인먼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69

[2016.06.14] 그레이엄 그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영국 타임즈 지에서 매주 발행하는 타임즈 문예 부록(Times Literary Supplement)의 보도국장을 맡고 있는 제임스 맥마누스는 얼마 전 허핑턴 포스트에 “그레이엄 그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실었습니다. 그 글은 당대에 이름을 얻었다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져가는 작가들에 대한 글입니다. 그는 그 글의 시작에서 자신이 20세기 가장 유명한 소설가 중 한 명이라 생각하는 ‘그레이엄 그린’을 젊은 동료들이 모른다는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중반 활약한 영국의 작가로 24편의 장편과 수많은 단편, 수필, 희곡을 썼고 여러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영화 “제 3의 사나이”, “하바나의 남자”, 그리고 랠프 파인즈가 주연한 최근 영화인 “애수(The End of the Affair)”는 모두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대표작 “권력과 영광”에 나온 “분노는 상상력의 부족이다(Hatred is a failure of imagination)” 라는 격언으로도 유명합니다. 몇 년 전,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 처조카들이 방학기간 동안 놀러 온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그중 한 아이가 제게 이모부는 왜 운전 중에 험한 말을 하지 않는지 묻더군요. 그때 저는 그린의 저 격언을 알려주며, 이모부는 누군가가 새치기를 하거나 갓길로 달리거나, 또는 무리하게 끼어드는 것을 볼 때, 그 차 안에 임산부가 있거나 비행기 시간이 아슬아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화장실이 아주 급한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지요.

제임스의 칼럼으로 다시 돌아와, 그는 왜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팔리는 데 반해 그레이엄 그린은 그렇지 못한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알기 위해 타임즈 지의 인기 문학 편집자 에리카 와그너(Erica Wagner)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에리카가 제임스에게 해 준 답변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그린이 지금 “무인지대(no-man’s land)”*로 들어갔으며, 한 시대의 모든 인기작가는 헤밍웨이나 디킨즈와 같은 불멸의 거장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이 무인지대를 거쳐야만 할 뿐 아니라 그 중 대부분의 작가와 작품은 영원히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과 함께, 그녀가 덧붙인 이야기는 제임스의 말문을 닫게 했습니다. 곧, 그녀는 1995년 세상을 떠난 이래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 캐나다의 뛰어난 소설가 로버트슨 데이비스를 자신이 열심히 띄우고 있다고 말했고, 제임스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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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먼저, 사람들이 가진 관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또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건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 큰 가치를 둘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대에 인기작가로 올라선 이들이라 하더라도 다시 시대를 넘어 고전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경쟁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 있겠지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으로 올라간 작품이 과연 그 작품이 가진 본연의 가치 때문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오늘날, 어떤 작품이 당대의 인기를 끌게 되는 데에는 그 작품을 둘러싼 사회의 영향, 혹은 운이라 불릴 수 있는 보다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다단한 요소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고전으로 남게되는 작품 역시 비록 그 정도는 약하다 할지언정 어느 정도는 그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50년만에 발굴되어 몇 년 전 다시 전 세계 문예지의 기사란을 채웠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처럼, 시대를 초월한 가치가 재발견되는 예들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 중, 누가 무인지대로 들어가고 있고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재발굴 될 수 있을지도 상상해보게 되는군요.

안타깝게도 로버트슨 데이비스의 대표작 “숨어있는 남자”는 1996년 디자인하우스에서 두 권으로 출간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이지만, 나머지 두 작가, 그레이엄 그린과 존 윌리엄스의 책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대표작인 “권력과 영광”은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2010년 출간된 책이 있습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알에이치코리아에서 2015년 1월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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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지대(n0 man’s land)는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2012.09.02] 그녀가 ‘화학적 거세’의 논의를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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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향신문에 실린 여성학자 정희진의 ‘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반박글이다.

저자는 ‘화학적 거세’를 성범죄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배경에는 성범죄자와 남성일반을 분리, 현재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수정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의도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위의 관심법은 잠시 후에 보기로 하자. 저자는 위의 결론을 끌어 내기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간단히 말해, ‘화학적 거세’는 과학적 근거도 실제 효과도 없다.”

2005년 실험범죄학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Criminology) 1권 117page 에 실린 “성범죄자에 대한 치료의 효과: 종합적 메타 분석”은 지난 20년간, 22,181명에 대해 이루어진 69개의 연구를 함께 분석하고 있다. 이중 화학적 거세에 해당하는 호르몬 처방은 6건의 연구가 있었고, 논문은 충분히 높은 확률(P<0.01)로 호르몬 처방이 효과가 있다(같은 책 130page)는, 저자의 주장에 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위의 주장을 하고 있나?

여기에 저자가 근거로 덧붙인 말은 이렇다.“섹스는 뇌로 하는 것이지 성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를 무엇으로 하는가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신체활동과 마찬가지로 섹스에서 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지금 논의되는 화학적 거세가 바로 그 뇌의 활동을 조절하는 호르몬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인간은 물리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분자들과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약 100조 개의 세포덩어리일 뿐이다. 호르몬은 기분을 변화시키며, 식욕을 조절하고,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물론 이런 유물론적 관점을 일상에서 거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이다. 그러나 법적 사회적 제도를 만들 때에는 취향이 아닌 합리적인 실험결과를 따라야 한다.

또 저자는 성범죄의 원인으로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 곧 가부장제 성문화”를 들고 이에 대한 반명제로 “인체의 화학에 원인이 있다”를 든다. 물론 일상의 성차별도 원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으로 부터 어떻게 “화학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을 기각하고 이에 모자라 “호르몬을 억제한다는 발상은 성범죄의 부양책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가? 똑같은 논리로 “인체의 화학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일상의 성차별을 줄이는 것은 성범죄의 부양책이다”고 주장해도 된다는 뜻인가?

한편, 저자는 대부분의 통계에서 남성들이 성범죄자에 대해 더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다고 하며, 앞서 말한 관심법으로, 이는 남성들이 ‘나는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추정을 한다. 이제 저자의 글을 반박하는 어떤 남성이든 “‘나는 아니다’를 말하기 위해 이 글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2010년 6월 18일 세계일보의 기사 ”국민 4명 중 3명 ‘성범죄자 거세 찬성’“은 여성이 더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다는 통계결과이다. 이제 저자는 남성 일반은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이자 동료이기 때문에 더 부드러운 처벌을 원한다는 추정을 할 차례인가?

이 글은 최대한 우호적으로 해석할 때, [소수의 성범죄자들에게 가해질지 모르는 ‘화학적 거세’는 우리 여성들이 가정에서,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늘 경계해야 하는 일상의 성범죄의 감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남성 일반들에게 면죄부를 줄 뿐이므로, 여성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일반 남성들의 여성관, 세계관을 수정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부장제 성문화를 무리하게 몰아붙이기 위해 저자가 사용한 “여성은 남성을 위한 용기(用器)”라는 단어의 근거는, 일반 남성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그가 만났던 소수의 성범죄자들의, “성욕은 배설과 같다”라든지,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주장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성범죄자들의 생각이 일반인과 다르게 위험하기 때문에 화학적 거세를 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뭔가 논리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상담내용을 인용하는 과정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또 있다. 서구의 화학적 거세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이것이 성 범죄자에게 적절한 처벌인가, 즉 호르몬이 일상에 끼칠 다른 영향과 관련된 2중 처벌의 위험과 같이 주로 성범죄자의 인권과 관련한 논의들이다 (‘성범죄자의 인권’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사람들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그러나 법정에서 성범죄자로 판결받은, 그래도 아주 작은 확률로 성범죄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 자’의 인권으로 생각해도 좋다. 곧, 이것은 사형제에 대한 논의와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나 20여년간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자들을 상담해온 저자는 – 내가 알고 있는 상담은 피상담자의 치료를 위하는 것으로 상담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며 상대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의 입장에 서려는 노력을 가정하는 것이다 – 상담내용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볼 때 상대방을 교정이 불가능한 괴물로 가정하고 상담을 해온 듯하다. 물론 여성의 입장에서 이런 흉악범들을 대할 때의 거부감도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 자신의 상담내용을 이 글에서 하듯이, 그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그리고 마침 그 사실이 내가 앞장서서 공격하고 싶은 남성중심의 가부장문화 전반을 공격하는데 얼마나 적절한지에 맞춰서 이용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마 이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의 무서운 점이 아닐까?

[2012.08.25] 21세기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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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끝났다.

한국은 세계에서의 실제 위상보다 충분히 더 높은, 집계방식에 따라 세계에서 다섯 번째, 또는 아홉 번째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한국축구는 염원하던 첫 메달을 땄고, 그때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리머니는 잔치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올림픽이 가진 정치성과 국가주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올림픽은 원래부터 국가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국가주의란 개인의 정체성에 국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 하는 사상이다. 우리는 올림픽에 국가를 대표해서 참가한다. 승리의 보상으로 국가가 연주되고, 국가별로 메달이 집계된다. 국가는 오늘날 전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이며 구성원에게 안전과 생활의 발판을 마련해 준다. 올림픽을 통해 우리는 소속감과 애국심을 다시 일깨울 수 있으며, 진정한 애국심은 정의로운 국가, 아름다운 국가, 평등한 국가를 자신의 이익보다 앞세움으로써 결국 이웃과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 이 정도가 올림픽이 가진 국가주의에 대한 최선의 변명일 것이다.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이 세계의 평화와 문명간의 이해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던 당시는 제국주의가 횡행하고 민족간의 투쟁을 정당화 했던 사회진화론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였다. 힘 있는 나라가 힘 없는 민족을 수탈하는 일이 하루가 다르게 벌어졌고,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라는 더 큰 악에 맞서는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그리고 쿠베르탱은 올림픽을 통해 국가간의 경쟁을 전쟁에서 스포츠로 잠시나마 돌려보겠다는 이상을 가졌고, 이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진보였다.

따라서 올림픽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재한다.

한편으로 오늘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타자에 대한 거부를 불러일으키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눈감게 하는 인종주의를 동반한다. 또,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집단주의가 가진 위험성마저 띄고 있다. 그리고 올림픽은 이런 현상을 자신들의 영향력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과연 올림픽을 전후한 기간의 외국인 혐오범죄는 올림픽의 이상에 걸맞게 줄어들었을까? 오히려 올림픽이 야기한 경쟁심과 대결주의로 인해 더 늘어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늘날 올림픽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올림픽은 필연적으로 다가올 다문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 세계는 더 빠른 속도로 섞이고 있다. 기술과 제도의 발전은 물리적 이동의 어려움을 사라지게 했고, 경제적 요구는 무엇보다도 강하게 인종과 민족의 벽을 넘어 우리에게 우리와 다른 문화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일상에서 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예일대 법학교수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는 외부인에 대한 관용이 지역사회 발전의 원동력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 즉 잠재적인 안전이라는 이익을 위해 이방인에 대한 거부와 폭력을 본성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버드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의 최신작 ‘우리 안의 천사본성’은 문명과 이성이 이룩한 21세기의 극적인 폭력의 축소를 이야기한다. 국지전은 극소수 지역을 제외하고 사라졌고, 교육은 인류의 대다수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쟁의 위험을 스포츠로 대신했던 폭력의 유연화가 아니라, 보다 문명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우리 안의 천사를 이끌어내어 폭력의 싹을 제거할 새로운 세계적인 잔치이다.

이제 21세기의 쿠베르탱이 나와야 한다.

새로운 올림픽은 국가라는 표지를 떼고, 순수하게 개인을 기본단위로 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체와의 일체감, 동료애, 단체경기를 위해 가치관, 이상, 주의주장들을 바탕으로 하는 팀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팀에 참가할 수 있고, 자신만의 팀을 만들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팀이 있고,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라는 팀들이 나올 것이다.

새로운 올림픽은 세계 평화에 진정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 전 단계로는 분쟁의 소지를 가진 각 지역들이 연합으로 팀을 만들어 올림픽을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북한과 일본이 한 팀을 만들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발칸 반도의 국가들이 한 팀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경쟁과 응원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그때 한-일 연합팀의 응원 구호를 ‘독도는 우리땅’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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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나, 시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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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주인공 데커드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레플리컨트(인조인간) 레이철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녀에게 말해줌으로써, 그 기억이 이식된 것이라는 것을, 곧 레이철이 인조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지를 알려주고 있다.

줄기세포, 그리고 복제라는 개념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동시에 복제된 정체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로부터 철학의 전통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여기서 ‘누구’ 대신 ‘무엇’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자. 과학자의 입장에서 ‘나’란, 곧 ‘나’를 구성하는 분자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나’를 구성하는 물질중의 일부가 제거되거나 교체되는 경우 ‘나’는 여전히 ‘나’인가? 손톱이나 머리카락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물질중의 일부가 분리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을 ‘정체성이 유지 된다’ 고 짧게 표현하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사고로 인해 팔,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경우, 또는 심장, 눈과 같은 장기를 대체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고, 우리는 그 경우에도 어렵지 않게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일관성, 즉 부분/기관의 상실/대체가 전체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두뇌를 대체하는 상상에 이르게 되면, 그 믿음은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미래에, 뇌의 모든 상태를 컴퓨터에 업로드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보자. 그리고 나의 노화된 뇌를 컴퓨터로 교체한 다면, 그때의 나는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래 기억에 관한 두 작품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는지를 말하고 있다.

만약 기억을 지속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일상을 살 수 있을까? 영화 ‘메멘토’는 기억을 10 분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모든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새긴 문신을 이용하여 기록을 남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범인을 찾으려고 한다. 후에 ‘다크나이트’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릴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미 그의 가능성을 이때부터 보였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대한 집착은 ‘인셉션’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반면 올해 출간되어 잔잔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S.J. 왓슨 의 소설 ‘Before I go to sleep’은 보다 평온하다. 40대 여성인 크리스틴은 잠이 들면 모든 기억을 잊게 되고 다시 깨어날 때는 20대의 어느 순간까지만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난다. 옆에서 자고 있는 낮선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이야기하며, 남편이 출근한 후 전화가 울리면 정신과 의사는 숨겨진 일기장의 위치를 말해준다. 그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는 남편을 믿지 말라는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소설의 제목대로 크리스틴은 잠들기 전에 가능한 한 자기가 알아낸 많은 것을 일기장에 써 놓고 자야 한다.
시간은 특별한 자원이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오직 죽음만이 시간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이 시간을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로 삼기도 하고, 때로는 싸워 이겨내야 할 지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아 발버둥 친다. 그 투쟁에 의해 시간은 각 개인에게 기억으로 바뀌어 남겨지게 된다.

시간을 지배한다는 개념은 근세 유럽에서 불사의 인간으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생 제르망’ 백작의 경우처럼 과거에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불사의 인간을 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한 ‘The man from earth’ 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한 집에서 대화를 나눌 뿐이지만, 주인공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관객들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까지도 그에게 경외심과 의구심을 동시에 갖게 만든다.

‘백 투 더 퓨처’, ‘엑설런트 어드벤처’와 같이 흥미위주의 소재로 다루어지던 시간여행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보다 현실적인 살을 붙여 아름다운 로맨스로 만든 다음 두 작품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 하더라도, 기억이 유지되는 한 타인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스스로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것을 조절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여자주인공은 어렸을 때 이미 성인인 장래의 남편을 만나고, 그가 사고로 죽은 후에도 젊은 시절의 그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린다. 소설은 SF의 재미와 독자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감동을 모두 가지고 있으나 영화는 다소 그에 미치지 못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랄드의 단편을 바탕으로 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로 바뀌어 더욱 감동을 준다. 주인공 벤자민 버튼은 정신은 보통사람과 같으나 노인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중년과 젊은 시절을 거꾸로 겪고 아기로 죽는다. 브래드 피트의 인상적인 분장과 연기뿐만 아니라 케이트 블랑쉐의 신비한 매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커다란 유혹이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고, 절대적인 시간이란 없음을 보였다. MIT 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앨런 라이트맨의 ‘아인슈타인의 꿈’은 이런 시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우아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인간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다시 보는 것을 주마등과 같다고 한다.(누가 알랴만은!) 매일 아침, 하룻밤의 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나는 깨어난다. 꿈속의 나에게는 그것이 최후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희생의 대가로 깨어난 나는 다시 오늘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에 안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