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2] 그녀가 ‘화학적 거세’의 논의를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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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향신문에 실린 여성학자 정희진의 ‘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반박글이다.

저자는 ‘화학적 거세’를 성범죄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배경에는 성범죄자와 남성일반을 분리, 현재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수정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의도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위의 관심법은 잠시 후에 보기로 하자. 저자는 위의 결론을 끌어 내기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간단히 말해, ‘화학적 거세’는 과학적 근거도 실제 효과도 없다.”

2005년 실험범죄학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Criminology) 1권 117page 에 실린 “성범죄자에 대한 치료의 효과: 종합적 메타 분석”은 지난 20년간, 22,181명에 대해 이루어진 69개의 연구를 함께 분석하고 있다. 이중 화학적 거세에 해당하는 호르몬 처방은 6건의 연구가 있었고, 논문은 충분히 높은 확률(P<0.01)로 호르몬 처방이 효과가 있다(같은 책 130page)는, 저자의 주장에 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위의 주장을 하고 있나?

여기에 저자가 근거로 덧붙인 말은 이렇다.“섹스는 뇌로 하는 것이지 성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를 무엇으로 하는가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신체활동과 마찬가지로 섹스에서 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지금 논의되는 화학적 거세가 바로 그 뇌의 활동을 조절하는 호르몬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인간은 물리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분자들과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약 100조 개의 세포덩어리일 뿐이다. 호르몬은 기분을 변화시키며, 식욕을 조절하고,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물론 이런 유물론적 관점을 일상에서 거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이다. 그러나 법적 사회적 제도를 만들 때에는 취향이 아닌 합리적인 실험결과를 따라야 한다.

또 저자는 성범죄의 원인으로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 곧 가부장제 성문화”를 들고 이에 대한 반명제로 “인체의 화학에 원인이 있다”를 든다. 물론 일상의 성차별도 원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으로 부터 어떻게 “화학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을 기각하고 이에 모자라 “호르몬을 억제한다는 발상은 성범죄의 부양책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가? 똑같은 논리로 “인체의 화학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일상의 성차별을 줄이는 것은 성범죄의 부양책이다”고 주장해도 된다는 뜻인가?

한편, 저자는 대부분의 통계에서 남성들이 성범죄자에 대해 더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다고 하며, 앞서 말한 관심법으로, 이는 남성들이 ‘나는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추정을 한다. 이제 저자의 글을 반박하는 어떤 남성이든 “‘나는 아니다’를 말하기 위해 이 글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2010년 6월 18일 세계일보의 기사 ”국민 4명 중 3명 ‘성범죄자 거세 찬성’“은 여성이 더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다는 통계결과이다. 이제 저자는 남성 일반은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이자 동료이기 때문에 더 부드러운 처벌을 원한다는 추정을 할 차례인가?

이 글은 최대한 우호적으로 해석할 때, [소수의 성범죄자들에게 가해질지 모르는 ‘화학적 거세’는 우리 여성들이 가정에서,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늘 경계해야 하는 일상의 성범죄의 감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남성 일반들에게 면죄부를 줄 뿐이므로, 여성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일반 남성들의 여성관, 세계관을 수정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부장제 성문화를 무리하게 몰아붙이기 위해 저자가 사용한 “여성은 남성을 위한 용기(用器)”라는 단어의 근거는, 일반 남성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그가 만났던 소수의 성범죄자들의, “성욕은 배설과 같다”라든지,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주장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성범죄자들의 생각이 일반인과 다르게 위험하기 때문에 화학적 거세를 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뭔가 논리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상담내용을 인용하는 과정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또 있다. 서구의 화학적 거세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이것이 성 범죄자에게 적절한 처벌인가, 즉 호르몬이 일상에 끼칠 다른 영향과 관련된 2중 처벌의 위험과 같이 주로 성범죄자의 인권과 관련한 논의들이다 (‘성범죄자의 인권’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사람들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그러나 법정에서 성범죄자로 판결받은, 그래도 아주 작은 확률로 성범죄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 자’의 인권으로 생각해도 좋다. 곧, 이것은 사형제에 대한 논의와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나 20여년간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자들을 상담해온 저자는 – 내가 알고 있는 상담은 피상담자의 치료를 위하는 것으로 상담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며 상대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의 입장에 서려는 노력을 가정하는 것이다 – 상담내용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볼 때 상대방을 교정이 불가능한 괴물로 가정하고 상담을 해온 듯하다. 물론 여성의 입장에서 이런 흉악범들을 대할 때의 거부감도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 자신의 상담내용을 이 글에서 하듯이, 그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그리고 마침 그 사실이 내가 앞장서서 공격하고 싶은 남성중심의 가부장문화 전반을 공격하는데 얼마나 적절한지에 맞춰서 이용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마 이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의 무서운 점이 아닐까?

[2012.08.25] 21세기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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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끝났다.

한국은 세계에서의 실제 위상보다 충분히 더 높은, 집계방식에 따라 세계에서 다섯 번째, 또는 아홉 번째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한국축구는 염원하던 첫 메달을 땄고, 그때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리머니는 잔치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올림픽이 가진 정치성과 국가주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올림픽은 원래부터 국가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국가주의란 개인의 정체성에 국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 하는 사상이다. 우리는 올림픽에 국가를 대표해서 참가한다. 승리의 보상으로 국가가 연주되고, 국가별로 메달이 집계된다. 국가는 오늘날 전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이며 구성원에게 안전과 생활의 발판을 마련해 준다. 올림픽을 통해 우리는 소속감과 애국심을 다시 일깨울 수 있으며, 진정한 애국심은 정의로운 국가, 아름다운 국가, 평등한 국가를 자신의 이익보다 앞세움으로써 결국 이웃과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 이 정도가 올림픽이 가진 국가주의에 대한 최선의 변명일 것이다.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이 세계의 평화와 문명간의 이해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던 당시는 제국주의가 횡행하고 민족간의 투쟁을 정당화 했던 사회진화론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였다. 힘 있는 나라가 힘 없는 민족을 수탈하는 일이 하루가 다르게 벌어졌고,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라는 더 큰 악에 맞서는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그리고 쿠베르탱은 올림픽을 통해 국가간의 경쟁을 전쟁에서 스포츠로 잠시나마 돌려보겠다는 이상을 가졌고, 이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진보였다.

따라서 올림픽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재한다.

한편으로 오늘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타자에 대한 거부를 불러일으키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눈감게 하는 인종주의를 동반한다. 또,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집단주의가 가진 위험성마저 띄고 있다. 그리고 올림픽은 이런 현상을 자신들의 영향력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과연 올림픽을 전후한 기간의 외국인 혐오범죄는 올림픽의 이상에 걸맞게 줄어들었을까? 오히려 올림픽이 야기한 경쟁심과 대결주의로 인해 더 늘어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늘날 올림픽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올림픽은 필연적으로 다가올 다문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 세계는 더 빠른 속도로 섞이고 있다. 기술과 제도의 발전은 물리적 이동의 어려움을 사라지게 했고, 경제적 요구는 무엇보다도 강하게 인종과 민족의 벽을 넘어 우리에게 우리와 다른 문화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일상에서 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예일대 법학교수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는 외부인에 대한 관용이 지역사회 발전의 원동력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 즉 잠재적인 안전이라는 이익을 위해 이방인에 대한 거부와 폭력을 본성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버드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의 최신작 ‘우리 안의 천사본성’은 문명과 이성이 이룩한 21세기의 극적인 폭력의 축소를 이야기한다. 국지전은 극소수 지역을 제외하고 사라졌고, 교육은 인류의 대다수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쟁의 위험을 스포츠로 대신했던 폭력의 유연화가 아니라, 보다 문명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우리 안의 천사를 이끌어내어 폭력의 싹을 제거할 새로운 세계적인 잔치이다.

이제 21세기의 쿠베르탱이 나와야 한다.

새로운 올림픽은 국가라는 표지를 떼고, 순수하게 개인을 기본단위로 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체와의 일체감, 동료애, 단체경기를 위해 가치관, 이상, 주의주장들을 바탕으로 하는 팀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팀에 참가할 수 있고, 자신만의 팀을 만들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팀이 있고,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라는 팀들이 나올 것이다.

새로운 올림픽은 세계 평화에 진정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 전 단계로는 분쟁의 소지를 가진 각 지역들이 연합으로 팀을 만들어 올림픽을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북한과 일본이 한 팀을 만들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발칸 반도의 국가들이 한 팀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경쟁과 응원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그때 한-일 연합팀의 응원 구호를 ‘독도는 우리땅’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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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나, 시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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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주인공 데커드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레플리컨트(인조인간) 레이철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녀에게 말해줌으로써, 그 기억이 이식된 것이라는 것을, 곧 레이철이 인조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지를 알려주고 있다.

줄기세포, 그리고 복제라는 개념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동시에 복제된 정체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로부터 철학의 전통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여기서 ‘누구’ 대신 ‘무엇’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자. 과학자의 입장에서 ‘나’란, 곧 ‘나’를 구성하는 분자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나’를 구성하는 물질중의 일부가 제거되거나 교체되는 경우 ‘나’는 여전히 ‘나’인가? 손톱이나 머리카락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물질중의 일부가 분리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을 ‘정체성이 유지 된다’ 고 짧게 표현하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사고로 인해 팔,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경우, 또는 심장, 눈과 같은 장기를 대체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고, 우리는 그 경우에도 어렵지 않게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일관성, 즉 부분/기관의 상실/대체가 전체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두뇌를 대체하는 상상에 이르게 되면, 그 믿음은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미래에, 뇌의 모든 상태를 컴퓨터에 업로드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보자. 그리고 나의 노화된 뇌를 컴퓨터로 교체한 다면, 그때의 나는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래 기억에 관한 두 작품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는지를 말하고 있다.

만약 기억을 지속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일상을 살 수 있을까? 영화 ‘메멘토’는 기억을 10 분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모든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새긴 문신을 이용하여 기록을 남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범인을 찾으려고 한다. 후에 ‘다크나이트’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릴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미 그의 가능성을 이때부터 보였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대한 집착은 ‘인셉션’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반면 올해 출간되어 잔잔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S.J. 왓슨 의 소설 ‘Before I go to sleep’은 보다 평온하다. 40대 여성인 크리스틴은 잠이 들면 모든 기억을 잊게 되고 다시 깨어날 때는 20대의 어느 순간까지만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난다. 옆에서 자고 있는 낮선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이야기하며, 남편이 출근한 후 전화가 울리면 정신과 의사는 숨겨진 일기장의 위치를 말해준다. 그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는 남편을 믿지 말라는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소설의 제목대로 크리스틴은 잠들기 전에 가능한 한 자기가 알아낸 많은 것을 일기장에 써 놓고 자야 한다.
시간은 특별한 자원이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오직 죽음만이 시간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이 시간을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로 삼기도 하고, 때로는 싸워 이겨내야 할 지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아 발버둥 친다. 그 투쟁에 의해 시간은 각 개인에게 기억으로 바뀌어 남겨지게 된다.

시간을 지배한다는 개념은 근세 유럽에서 불사의 인간으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생 제르망’ 백작의 경우처럼 과거에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불사의 인간을 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한 ‘The man from earth’ 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한 집에서 대화를 나눌 뿐이지만, 주인공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관객들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까지도 그에게 경외심과 의구심을 동시에 갖게 만든다.

‘백 투 더 퓨처’, ‘엑설런트 어드벤처’와 같이 흥미위주의 소재로 다루어지던 시간여행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보다 현실적인 살을 붙여 아름다운 로맨스로 만든 다음 두 작품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 하더라도, 기억이 유지되는 한 타인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스스로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것을 조절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여자주인공은 어렸을 때 이미 성인인 장래의 남편을 만나고, 그가 사고로 죽은 후에도 젊은 시절의 그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린다. 소설은 SF의 재미와 독자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감동을 모두 가지고 있으나 영화는 다소 그에 미치지 못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랄드의 단편을 바탕으로 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로 바뀌어 더욱 감동을 준다. 주인공 벤자민 버튼은 정신은 보통사람과 같으나 노인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중년과 젊은 시절을 거꾸로 겪고 아기로 죽는다. 브래드 피트의 인상적인 분장과 연기뿐만 아니라 케이트 블랑쉐의 신비한 매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커다란 유혹이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고, 절대적인 시간이란 없음을 보였다. MIT 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앨런 라이트맨의 ‘아인슈타인의 꿈’은 이런 시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우아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인간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다시 보는 것을 주마등과 같다고 한다.(누가 알랴만은!) 매일 아침, 하룻밤의 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나는 깨어난다. 꿈속의 나에게는 그것이 최후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희생의 대가로 깨어난 나는 다시 오늘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에 안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