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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데우스를 읽고

호모데우스 – 유발 하라리

아직 호모데우스의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작인 사피엔스를 읽고 그가 흔한 베스트셀러 저자가 아님은 눈치챘지만 이렇게 내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십 년 이상 내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불편을, 하라리는 너무나 쉬운 방법으로 해결한다. 내가 감히 시도하지도 못했던 답이지만, 받아들이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 오히려 그간의 내 소심함만을 탓하게 될 뿐이다.

호모데우스를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인류는 아래 도식과 같은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 —> 인본주의(자유주의) —> 과학

이 도식 자체는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호모데우스 역시 전작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을 잘 엮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대부분의 그가 이야기하는 사례들이 이미 알던 것들이며, 책의 후반부 어느 시점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안고 있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세계관의 변화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내 세계관의 변화 또한 위의 도식과 매우 비슷한 흐름을 겪었다는 것이다.

1996년 겨울에서 97년 여름까지의 기간은 내 삶에서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나는 이 시기 내게 매우 큰 지적 영향을 끼치게 된 두 권의 책을 만난다.

나는 독실한 부모님과 친척 다수가 목회자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자연스레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으며, 가능한한 종교가 가진 긍정적 의미를 찾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창조과학 같은 과학에 대한 명백한 부정에 대해서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맹목적인 이들의 자기만족 정도로 치부하며, 한 번씩 다가오는 근본적 의문 역시, 내가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한 그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입시가 끝나 다소간의 여유가 있었고, 겨울 방학 동안 도서관 4층의 교양과학 서가에 꽂힌 책들을 모두 읽으려는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에는 책꽂이로 서너 열 정도로 그렇게 책이 많지는 않았다. 보이는 대로 몇 권을 읽어나가던 중 내 손에 잡힌 것이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찾기 힘든, 노란색 표지의 문고판으로 기억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뚜렷한 목적이나 사전지식을 가지고 책을 읽기 보다는 그저 눈에 뜨이는 대로 읽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그저 특이한 제목의 책이라 생각하며 나는 책을 읽어 나갔다.

인생은 한 번씩 아무런 예고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이기적 유전자’ 또한 그랬다.

어느 글에서인가,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어린시절의 사건으로 유년기에 시작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에 대해 쓴 일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명령은 일종의 행동 강령처럼 내 소년기를 지배했다. 이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거나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결국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처한다면?’이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이며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에 대한 이해, 곧 나는 왜 이렇게 느끼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나는 심리학 책들을 계속 찾아다니며 읽었다. 애런슨의 ‘사회심리학’, 치얼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등은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기적 유전자’가 이런 질문, 곧 나의 느낌과 나의 욕망에 대해 왜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왜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는 환상적인 프레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얼마 뒤 출판된 조지 윌리암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에서 이 표현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육체적 특징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규칙을 따라 진화해왔다면 정신적 특징 또한 그러지 않았어야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의 모든 호오와 무관심, 열정과 혐오, 심지어 지식에 대한 이끌림까지도 그 뿌리에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미생물에서 출발한 극히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원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진화심리학의 첫 만남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화심리학을 21세기의 ToE(Theory of Everything: 물리학에서 유래한, 모든 것의 이론)이라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왜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진화심리학은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설명력은 이론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어도, 진화심리학은 너는 특별하지 않다, 너는 생물학적 존재다, 너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의 사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진화론의 단점은 설명은 매우 그럴듯하게 해줄 망정,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다음 20여년을 보다 실질적으로 지배한 사상은 다른 하나의 책, 아니 사람을 만나면서 접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고등학교 친구들과 같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나는 한 친구가 가져온 책 한 권을 만난다. 그 책이 바로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 계간지였다. 나는 민박집에서 그 책을 다 읽은 뒤 학교로 돌아와 전월호들과 그의 다른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자연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여러 조류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접한 것이 인본주의, 특히 자유주의였다.

강준만 교수 외에도, 당시는 그런 사회적 필요와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자유주의 논객들에 의한 계몽의 시대로 누군가는 기억할 수도 있다. 홍세화, 고종석, 진중권, 김규항 등 지금도 여전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의 책을 나는 나오는대로 읽었다. 결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이들이 기본적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에 부족했던 인본주의와 특히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전파했다는데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시 그렇게 책을 탐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내 존재에서 목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조기교육의 문제점을 주장하는 글에 전형적인 예로 등장했을 만한 이였을 수도 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대학원생의 본분은 연구였지만, 나는 친구들을 따라 시험을 치고, 친구들을 따라 상급학교로 계속 진학했을 뿐, 본분이나 그 목적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형식 만을 겨우 흉내내고 있었다. 늘 해야할 일과 나를 분리하려 했으며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 자신을 찾는, 그런 크게 뒤늦은 무책임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방황 혹은 거리두기에서 오는 공허함을 나는 책에서 찾았고 책은 나름의 보상을 주며 나를 더 책 속으로 이끌었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을 게임에 썼다. 게임에 대해서도 앞으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부정적으로! 하지만 적어도 그런 공허함을 채워주는 데는 더없이 유용했다는 점을 포함해.) 그렇게 97년 즈음부터 2004년 박사를 받고 3년 반의 에트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2007년 까지 10년 동안 매년 10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게 20년 전,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나는 서서히 종교의 영향을 벗어나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내 정체성을 과학자에서 찾아 왔기에, 나는 내가 종교로부터 독립하게 된 계기를 그 정체성, 곧 과학의 힘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쓰나미처럼 내 정신의 세계로 밀려와 방사능처럼 침투했다.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하며, 그리고 솔깃하다 못해 자극적인가!

특히 과학과 달리 자유주의는 행동원칙을 정해 주었다. 당위를 주었고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 전까지 나를 옥죄던 모든 구습과 구태,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상대에 대해 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기위해 그 이유를 힘들게 찾아야했던 어려움을 나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쉽게 벗어던지고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당대의 난제들을 손쉽게 해결하는 듯 보였다. 동성애, 안락사, 성매매, 간통 등의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린 알렉산더의 칼처럼 명쾌한 답을 주었다.

물론 자유주의가 어쩌지 못하는 경계는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자살? 본인의 선택이 아닌가? 한가지 어정쩡한 답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어정쩡하다. 주변 사람들이 받는 피해의 종류는 물질적 피해에서 정신적 슬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당사자가 내린 결단의 힘에 어찌 비할까? 그래서 누군가는 자살만이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 하지 않았을까?

자유주의가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과학은 자살에 대해 훨씬 더 효율적인, 그러나 경박한 답을 준다. 자살은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이다. 약을 먹고 고쳐라! 사람들은 이런 처방이 가진 독성을 눈치채지만 다른 방도 없이 이를 받아들일 뿐이다. 물론 과학의 장난은 끝이 없다. 인간은 때로 고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한다. 진화심리학은 교묘하게 이 희생의 가치를 유전자로 환산한다. 당신이 목숨을 버려 자식을 살려야 한다면, 한 명은 손해, 두 명은 쌤쌤, 세 명은 이득이다!

문제는 끝이 없다. 마약은? 혼자 골방에서 하는 마약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마리화나에 대해서는 적어도 승리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큰 쾌락을 줄 수 있는 약들은 어떤 원리로 막아야 하는가? 수간은 또 어떠한가? 양들이 침묵하는 일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마약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막아보자. (그렇다면 사회의 유지가 개인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 물론 현실적으로 당연히 그렇다. 국가는 이를 등에 없고 개인을 감시하고 불순분자를 제거한다. 그리고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수간은 동물권이라는 (육식의 종말?) 일종의 인본주의의 확장을 통한 답이 있다. (적어도 수간으로 채우려는 욕망이 저급한 욕망이라는 도덕적인 답이 마음에 든다면, 사회를 다시 신정의 시대로 retro!)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동물권에 대해,(특히 육식에 대해) 기독교는 일찌감치 창세기에서 이미 인간을 만물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문제의 싹을 잘라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살생을 금한 불교는 유발 하라리가 거듭 호감을 표하듯 특이하다.)

물론 여기서 과학은 또다시 장난을 계속한다. 사실상 인간이 타인의 수간에 혐오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동물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동물에 대한 사랑을 철저하게 분해한다. (물론 수간 역시 동물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인간이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이유 중에는 역사적으로 더 귀여운 반려 동물이 더 높은 값을 받고 더 많이 팔림으로써 인간의 개입에 의한 품종의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있다. (얼마나 시장주의적 기원인지. 물론 이 이야기의 의미는 당신이 당신의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의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의 장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동물에 대한 사랑을 인간이 인간의 아기에 대해 가지도록 만들어진 애착(큰 눈, 몸집에 비해 큰 머리 등)에 의한 일종의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로렌츠). 심지어 동물을 귀엽게 느끼도록 만드는 기생충(톡소플라즈마)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이것은 너의 자유가 아니라는 뜻.)

어쨌든 자유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원칙 – 원하는 대로! 피해는 금물! – 에서 양쪽에서 다가왔다. 먼저 등장한 것은 ‘피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육체적, 물질적, 객관적 피해만이 주요한 피해로 여겨졌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정신적, 관념적, 주관적 피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역시 처음에는 합리적인듯 보였다. 내 기분이 나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를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누군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황에서, 누구의 기분도 나쁘지 않아야 한다는 구호는 얼마나 형식적이고 공허한가! (패러독스의 아버지 러셀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그렇게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원하는’ 이라는 단어에서 나타났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독립성과 욕망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개인의 욕망이 거시적으로는 진화의 산물임을, 미시적으로는 화학물질의 영향임을 밝혀내고 있었다. (한편, 잡스와 같은 선지자가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다’는 테제를 내세운 것은 흥미롭다.) 진화심리학은 지금 당신이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과거 당신 조상의 생존(과 번식)에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바로 그러한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당신에게 이득이다. 나는 ‘가장 소중한’ 나의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누가 인간의 본능을 더 자극하고, 누가 대중을 더 잘 속이느냐에 따라 보상을 준다. 속임수는 진화의 주요 메커니즘이고, 종교와 자유주의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다.)

어쨌든 자유주의라는 개인적 원칙을 사회적 원칙으로 확장하기위해서는 다수의 욕망과 피해를 조율할 수 있도록 근본적 수선이 필요했다. 그것이 공리주의다. 사회적 원칙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효용을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효용 – 이익과 피해 – 과 타인의 효용을 비교해야 했다. 그것이 돈으로 치환가능한 물질의 한계를 벗어날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계산하고 비교해야할까? 한 가지 문제는, 위의 자살의 경우에서 보았던 것처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피해를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결과적으로 다수결)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의 여러 문제가, 이들이 명백하게 과학의 발전에 따라 더욱 드러나고 부각되고 있는 것임에도, 이 공리주의의 문제는 과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분법을 연속적인 변수로 만드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며, 사실상 전문영역이다. 정신적 만족과 피해를 양화(quantize)하기 위해 최신 뇌과학 기술 곧, 호르몬의 양, 뇌 신경의 흥분 정도, 뇌 신경의 구조적 특성 등을 이용해 어떤 척도(measure)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규칙이 사회 구성원 앙상블의 행동, 생각, 환경의 변화를 만들고 이것이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미치는 쾌감과 비감을 종합한 효용의 크기를 양적으로 환산하면 문제는 풀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를 우회해 사회 전체의 효용을 최대화 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훨씬 빠르게 진군하는 과학의 승전보들에 비하면 미봉책일 뿐이다.

호모데우스를 읽기 전 마지막 단계로, 나는 자유의지의 문제에 빠져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생각했다. 사실상 자유의지의 문제는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이미 결정이 난 문제이다. 단지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만이 아니라 쥐와 물고기를 거쳐 단세포 생물까지 올라간다. 생각하는 나, 선택하는 나는 환상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진화론이 아니어도 라플라스적 세계관(결정론), 곧 물리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미래라는 개념으로 자유의지의 부재를 미리 의심할 수 있다. 이를 미시적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당신의 모든 생각과 욕망은 (의학과 생물학 이 말하듯이) 뇌의 신경세포의 활성화에 따라 정해지며, 뇌 신경세포의 활성화는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곧 철저한 인과관계, 가장 아름다운 물리법칙으로 꼽히는 맥스웰 방정식을 따르는 전자들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유의지 문제에 결정론 vs. 우연이라는 또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결정론은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잠깐 흔들렸으나, 다시 물리학자들의 합의를 얻어가고 있다. 한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의 블로그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에서 결정론을 지지하는 이의 비율은 30% 정도였다. 결정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양자역학이 세상을 묘사하는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결정론이건 우연이건, 자유의지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없다”는 위에서 제공한 논리들 외에 또다른 논리를 추가한다. 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원리, 바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를 이용한다. 곧, 당신이 무언가를 원하게 되었을 때,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마음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 마음은 당신의 의식에도 (당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나타났을 뿐이다. 위의 미시적 관점을 따르면, 뇌의 특정한 회로가 특정한 환경 조건 – 혈당이 떨어졌다 – 에 의해 특정한 신호 – 배가 고프다 – 를 당신의 의식에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로봇청소기가 배터리가 부족할 때 충전기로 찾아가는 것과 하나도 다를바 없다. 샘 해리스는 뒤이어 쇼펜하워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할 지는 정할 수 없다.” 자기가 무엇을 원할 지를 정할 수 있다면 인간사의 그 무수한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 텔레비전, 영화도 재미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고 내재화 하면서도 나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자유주의를 계속 조금씩 비틀어 과학의 진보에 끼워 맞추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호모데우스를 읽는다. 결국 나의 문제는 하나였다. 자유주의(인본주의)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세계관은 동시에 만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명확하다.

하라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 선구자들을 비웃는다.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 그밖에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자유주의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백 페이지에 걸친 박식한 논증으로 자아와 자유의지를 해체한 뒤, 숨이 막힐 듯 놀라운 지적 공중제비를 넘어, 마치 진화생물학과 뇌 과학의 모든 경이로운 발견들은 로크, 루소, 토마스 제퍼슨의 윤리적/정치 이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18세기에 착지한다.” P.419 “호모데우스, 김영사”

그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면!)

이것이 내가 서두에 말한 충격이다. 서두의 도식에서 본 것처럼, 인본주의를 버려야 한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물론 인본주의를 버린다는 것이 당장 인명을 경시한다거나 타인의 자유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그리고 공리주의)는 여전히 타인의 존중을 받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유용하다. 하라리는 이를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가 아닌 제 3의 실재, 곧 상호주관적 실재라고 표현한다. (전작 사피엔스에서 돈, 종교, 국가 등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사용한 개념이다.) 단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주춧돌 역할을 했던 이 사상에 대해 그 주춧돌을 꺼낸 다음 그 아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수렵채집인들에게 수렵채집 생활을 버리고 농경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했을 것처럼,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를 통해 거듭, 농경생활을 시작해 인간은 더 불행해졌다고 말하는 듯 하다. 수렵채집인 개인은 가능한 최대한 수렵채집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본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주장이다. 단지 수렵채집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농경생활이 자리잡은 것처럼, 인본주의 또한 그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이다.

자유의지는 없다. 이것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받아들인 것이고, 진화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쌓일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결정론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곧 미래는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정되어 있었다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자 하나하나 조차도 최초의 빅뱅 순간에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적어도 다른 그 어떤 대안들에 비해서 보다는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결정되어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것은 물리학의 문제일 뿐이다.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의 의지나 선택이 들어갈 여지는 없으며, 그저 우연성(randomness)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거시 세계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실 – 자유의지의 부재 – 가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자세에 영향을 주어야할 이유는 없다. 그저 모든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일희일비의 번뇌에서 우리를 한 발 더 떨어뜨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자유주의 또한 근거를 잃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라리는 다시 교묘한 출구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말한 상호주관성에 의해, 자유주의는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단지 수렵 채집인이 농경인에게 밀려나듯이, 자유주의 또한 그런 신세를 면치 못하게되리라는 것 뿐이다. 수렵 채집인은 수렵 채집이 가능한 환경이 존재하는 한 농경인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같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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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한 가지.

뉴스페퍼민트라는 외신을 번역하는 서비스를 5년째 하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막연히 누군가는 내가 재미있어 할 내용을 재미있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동안 나름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왜 인간은 뉴스를 좋아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뉴스에 그렇게 수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또다시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뉴스를 좋아하는 것이 뉴스가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형적인 ‘오래된 연장통’의 논리를 부른다. 비만이나 포르노 중독과 같은 현대병이 인간이 현대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부작용인것처럼 뉴스 중독 – 페이스북도 물론 –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뉴스를 만드는 것은 사회적 비효율에 일조하는 행위가 된다! (당연히 이는 극도의 단순화이다.)

또다른 뉴스페퍼민트의 문제는 비록 근본 철학으로 ‘언어의 장벽을 없앤다’라는 측면과, 뉴스페퍼민트의 기사를 가능한한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정보의 공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인해 몇몇 언론과 힘들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본질적 가치인 정보의 공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의 마지막 장에서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종교로 데이터교를 이야기하며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데이터교의 지고한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정보를 흐르게 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이며 정보의 자유는 “미국이 소련보다 더 빨리 성장하게, 미국인이 이란인이나 나이지리아 인보다 더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게(P.526)” 만들어주는 절대적 가치라 그는 말한다. 즉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사회에 이롭다. 또한 “정보가 자유롭게 유포될 권리는 인간이 정보를 소유하고 그 흐름을 제안할 권리보다 우선(P.524)”한다고 말한다.

호모데우스 식으로 말하자면, ‘뉴스 본능’은 인본주의의 기준으로는 개인의 후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호모데우스는 정보를 찾고, 소화하고, 전달하는 ‘뉴스본능’이 인본주의보다 더 강력하며 더 오래 살아남을 것임을 말하는 셈이다.

CES란 무엇인가

올해도 CES를 다녀왔다. 참석 횟수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전 세계의 몽상가들이 가져온 다양한 아이디어를 즐기는 것이 CES의 핵심이라 여겼다. 그들의 아이디어 하나하나에는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기술에 기반한 기발한 해결책이 들어 있었다. 비록 어떤 이는 시제품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제품을 선보였고, 어떤 이는 그저 부스에 앉아 자신의 아이디어만을 말했지만,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서 자신의 아이디어가 세상 사람들을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그들을 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 그들을 응원하며 그런 세상이 더 빨리 오기를 바라게 되곤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그런 멋진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키고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 오는 이가 소수에 불과한 것을 계속 보게 되면서, 나는 어쩌면 아이디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CES는 매년 1월 초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소비자(Consumer) 전자제품(Electronics) 전시회(Show)이다. 21세기, IT 기술의 발전은 센서, IoT, AI 등의 기술과 함께 일상의 거의 모든 도구를 전자 제품으로 바꾸고 있고 CES는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특정 분야의 전시회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으면서 자동차를 비롯한 온갖 다양한 제품과 기술을 다 받아들이는 포용성을 보였고, 여기에 2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는 라스베가스라는 도시의 특성이 만나 다른 여느 전시회들과 차별화된, 규모와 미디어의 관심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회가 만들어졌다. 

CES를 즐기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매년 바뀌는 기술 트렌드를 중심으로 최신 기술로 무장한 대기업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는 이들과, 특정한 문제를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대적으로 보편화된 기술을 이용해 해결하려는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보는 이들이다. CES의 전시장 구조 또한 이런 구분에 충실하다. 전시장은 모두 세 곳이지만, 사람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은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위치한 샌즈(Sands) 전시장과 주요 대기업이 위치한 라스베가스 컨벤션 센터(LVCC)이다. 물론 최근 참가 기업이 크게 늘어난 탓에 공간이 넓은 라스베가스 컨벤션 센터에 특정 분야의 중소기업이 점점 더 많이 배치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발견되는 곳은 초기 스타트업들이 자리잡은 샌즈 전시장의 1층이며, 그런 이유로 이곳은 ‘유레카 파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매년 유레카 파크를 둘러보면, 올해 어떤 몽상가들이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왔는지, 그리고 지난해 등장한 아이디어가 올해에는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게 된다.

서두에 나는 멋져 보이는 아이디어라 하더라도 실제 제품으로 구현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아이디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와 정확히 반대 상황이 벌어질 때에도 아이디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곧, 그 아이디어가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조금씩 다른 방식, 혹은 다른 목적으로 그 아이디어를 쉽게 활용하게 되는 경우 말이다. 복제나 특허 같은 문제와 무관하게, 이는 그 아이디어의 뛰어남을 말해주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만의 새로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만들려 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가지고 온 기발한 아이디어를 조금씩 바꾸어 시도해 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다는 뜻이며, 이 경우 아이디어 자체는 마치 공공재처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세상에 소개된 뒤 많은 이들이 위시리스트에 올려 놓았을 법한 이카로스(Icaros) 라는 VR 운동장치가 있다. 이카로스는 발명가인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든 날개를 달고 최초로 하늘을 날았던 신화 속 인간이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하늘을 나는 것은 인간의 오랜 꿈이다. VR로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면 어떨까? 몸에 좋은 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다면? 이렇게 그들은 플랭크 운동이라는 자연스러운 요소를 더해, 즐거움과 유익함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당시 이 제품은 약 천 만원으로, 가까스로 위시리스트에 올릴만한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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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ACE (ICAROS)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디어는 중요하지 않다. 이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한 이들이 한 두 명이었을까? 올해 플라이저(Flyser) 라는 벨라루스의 회사는 거의 같은 기능을 가진 제품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품은 약700만원으로  조금 더 저렴한다고 말했고, 또 컨텐츠를 이용해 고소공포증과 같은 증상을 치료하는데도 사용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FLYSER

사실 하늘을 나는 경험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위의 두 제품이 하늘을 날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해 운동이나 치료라는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면, 버들리(Birdly)는 아예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경험을 제공하는 제품을 만들었다. 사용자는 두 팔로 날개 짓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이 하늘을 나는 새가 된 듯 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얼굴 앞에 위치한 선풍기가 일으키는 바람은 자신이 정말로 하늘을 날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쉽게도 이 제품은 위시리스트에 올리기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인 약 1억원으로, 그들 역시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개인이 아니라 놀이공원과 같은 시설에 판매할 예정”이라 말했다.

BIRDLY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제트팩을 달고 진짜 하늘을 나는 경험에 비해 VR은 상대적으로 훨씬 간단한 기술로, 그리고 더 중요한 잇점인, 훨씬 더 안전한 방법으로 어느 정도는 비슷한 경험을 제공한다. 즉, 이런 경험을 제공하는 제품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제품이 연이어 등장하는 경우는 매우 많다. 사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디어가 충분히 좋다면 이는 거의 당연한 일이다. 최근의 IoT와 웨어러블, AI 스피커 열풍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많은 이들이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최근 푸른 빛이 생체리듬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들이 발표되자, 눈에 특정한 파장의 빛을 쐬어 생체리듬을 조절하겠다는 여러 제품들이 등장했고, 올해에는 오스람과 같은 대기업이 빛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PEGASI
OSRAM

곧, 비슷한 제품이 등장하는 것은 모두가 그 아이디어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는 좋은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왜 아직까지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을지, 정확히는 그 아이디어를 구현한 제품이 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이는 CES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곧, 어떤 해에 등장한 아이디어가 충분히 참신하고 그럴 듯 하다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 해 비슷한 회사가 나와야 하며, 그렇지 않았을 때 오히려 그 아이디어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강조하듯이, 좋은 아이디어처럼 보였지만 제품으로 구현되지 못하는 경우이든, 아니면 반대로 하나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수많은 조금씩 다른 비슷한 제품이 등장하는 경우이든, 그 제품이 시장에서 실제로 성공을 거두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래서 다시 한 번 아이디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어쨌든 어떤 아이디어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제품으로 구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돈(자본)이다. 때문에 유레카 파크의 부스 중에는 투자자를 찾는다는 말을 하는 곳이 많다. 아마 그들에게는 돈이 매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투자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들은 수많은 몽상가의 아이디어를 거의 매일매일 접하고 있다. 곧, 모든 투자자는 아이디어는 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순히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좋고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극히 훌륭한 아이디어라도 그 아이디어가 현실에 구현된 뒤 비즈니스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할 수 있을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투자자에게는 돈 또한 흔한 자원이다. 

어떤 극히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가가 운 좋게 투자자를 구했을 때, 그리고 더 운 좋게 그들에게 투자하겠다는 여러 투자자들이 생겼을 때, 그래서 투자자들 중에 누구에게 투자 받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거나 해야할 때쯤에는 이제 창업가도 이런 사실에 익숙해진다. 곧, 아이디어가 흔한 만큼,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창업자를 찾는 돈 또한 넘쳐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세상에는 대박을 꿈꾸는 창업가들 만큼이나 대박을 꿈꾸는 자본이 많다. 이렇게 아이디어와 돈은 세상에 넘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쯤 정말 중요한 것은 실행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곧, 실행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제 공은 다시 창업자에게로 돌아왔다. 실행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분야에 대한 창업자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빠르게 실행 가능한 제품(MVP, Minimum Viable Product)을 만드는 린 스타트업 창업론도 실행을 강조한 방법론이다. 최소한의 기능을 가진 제품과 서비스를 빠르게 만들어 고객의 반응을 살피고, 이를 끊임없이 반영해 기능을 개선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어가며 그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창업자는 다음 단계에 필요한 능력을 파악하고 인재를 구해야 하며, 계획을 수정해가며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에 한 가지를 더 꼽으라면, 아니 어쩌면 위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집념에 가까운 확신이 필요할 것이다. 좀더 과장하면 광기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도 있다. 라스베가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빌게이츠가 몇 년 전 올해의 책으로 꼽았던 슈독(Shoe Dog)을 읽었다. 슈독이란 신발에 미친 사람을 말한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인 이 책에서 그의 모든 행동은 이 한 단어로 설명된다. 미쳐야 한다. 불광불급.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책 제목도 있다. 미쳐야 미친다. 영어로는 이렇게 될 것이다. To reach, be mad. 

이렇게 기발한 아이디어와 자본, 그리고 창업자의 실행능력과 확신이 만나 제품을 출시하게 되면 이제 이들은 샌즈의 1층, 유레카 파크를 졸업하고 샌즈의 2층에 위치한 중소기업 부스로 올라갈 준비가 된 것이다. 샌즈의 2층은 부스 비용과 천장의 높이가 다른 진짜들의 전장으로 스마트홈, 건강, 웨어러블, 모바일, 스포츠 등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올해 샌즈 2층에는 바디프렌즈, 인바디, 코웨이, 골프존, 웰트 등의 국내 회사들이 대형 부스를 설치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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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FRIEND

사실 샌즈 2층에서 이 정도 크기의 부스를 만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자랑할만한 일이다. 바디프렌즈의 람보르기니 자동차는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고, 골프존의 골프 게임과 야구, 테니스 게임을 경험해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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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 2층에 위치한 많은 회사들은 적당한 업력과 매출 혹은 투자금을 가지고 있으며 고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신제품을 출시하고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며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등 성장의 러닝머신에서 발을 삐끗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펼치게 된다. 한 두 번의 작은 실수는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실수는 위험하다. 마케팅 또한 중요하다. 적절한 시점의 마케팅은 스타트업의 필수 요소인 스케일업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 누군가 이런 말을 이미 했을 것이다. 성공에 한 가지 확실한 공식이 있다면 바로 공식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한 번 성공한 기업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성공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이른 성공이 발목을 잡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요소를 갖추고 출발한 것처럼 보이는 기업도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혀 수천만 불의 투자금을 날리고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등장한 외인구단이 기존의 강자를 물리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중소기업의 전장에서 꾸준한 성장을 이루는 것은 앞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투자자를 찾고, 제품을 구현해 시장에 출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이 단계로 갈수록, 불확실성이라는 마지막 요소가 점점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운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어떤 기술은 너무 빨리 등장하고, 어떤 기술은 너무 늦게 개발된다.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한 수많은 기업도 인간사의 여러 문제, 사소해 보였던 경영상의 실수, 아니면 천재지변과 같은 시장의 변화 때문에 명멸을 거듭하게 된다.

샌즈 2층에서 계속 부스의 크기를 키워나가던 이들은 언젠가 대기업이 위치한 라스베가스 컨벤션 센터로 넘어가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이제 나의 짧은 CES 경험만으로는 어떤 회사가 중소기업을 졸업하고 대기업으로 갈 수 있는지, 곧 이 단계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어려운 일일지 말하기 어렵다. 대기업으로의 성장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스타트업의 성공과 더 어려운 중소기업의 성장보다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CES를 관찰해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쩌면 한 20년 정도는 참석해야 할 것 같다. 물론 CES는 올해로 51년째를 맞이 했고, 부스에서 기자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자신이 CES에 다닌지 수십 년 이 되었다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성립한다. 바로 대기업이라고해서 성장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위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CES 기사들이 전하는 것처럼, 올해 삼성과 LG는 적어도 전시장의 규모와 제품의 인기에서 소니, 샤프 등의 일본 회사들 뿐 아니라 퀄컴, 인텔과 같은 미국 회사들도 압도했다.

특히 LG 의 롤러블 TV는 보는 이들이 실시간으로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최근 몇 년 간 텔레비전이라는 오래된 분야에서 이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 제품이 있었나 싶다. 또 삼성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219인치 크기의 더 월 역시 가만히 벽 앞에 서서 화면만을 끝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감동을 주었다.

LG전자가 현지시간 8일부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9' 전시회에서 세계 최초 롤러블 올레드 TV인 'LG 시그니처 올레드 TV R'을 공개해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LG Rollable TV

물론 CES 에서의 규모가 이들 대기업의 실제 실력이나 성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는 않을지 모른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더 치열한 전쟁이 그 뒤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들 또한 끊임없이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필요로 할 것이며, 모기업의 투자를 받기 위해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고, 그렇게 이 사업을 책임진 이의 강력한 리더십을 따라 제품을 출시하고, 마지막으로 운이 따르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아이디어 없이 사업을 시작할 수는 없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 그 자체보다, 창업자가 자신의 목표를 꿈꾸게 만들기 때문에 중요하다. 창업자의 이런 꿈에 투자자의 돈이 더해지고, 다시 실행이 이루어진 뒤, 운이라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만나 인류의 삶이 개선되고 각자의 꿈 또한 이루어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CES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확신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창업자들을 만날 수 있다. CES를 그저 둘러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열정은 관람객들이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돌아가게 만든다. 올해의 관람객이 내년에는 어딘가 작은 부스를 열고 이제 손님이 아닌 주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템을 두고 사람들에게 열정을 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흘 동안 전세계의 잠재 고객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와 제품을 평가받는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떤 나라의 누군가가 던진 한 마디가 계속 기억에 남아, 자신의 제품을 개선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며, 그렇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CES 는 전세계 몽상가들의 아이디어를 화학적으로 반응시키고, 투자자들의 투자와 기업가들 사이의 협력, 제휴를 유도할 뿐 아니라, 개선된 제품과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이게 만들어 세상을 더 발전하게 만든다. CES는 인류의 지성이 집단지성으로 동작한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CES는 인류에 기여한다.

6. 같은 기술 다른 용도

사실 이번 꼭지를 앞 꼭지의 제목인 ‘같은 문제, 다른 해결’에 대응되는 ‘같은 기술, 다른 용도’로 잡긴 했지만, 하나의 기술이 여러 문제의 해결에 사용되는 예는 너무나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꼭지는 ‘앗 이런 용도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준 기발한 제품을 소개하려 한다.

1) 인핸시아(Enhancia)의 니오바(Neova)
니오바는 음악을 연주할 때 손가락에 끼워 이펙트를 줄 수 있는 IoT 반지이다.

어떤 대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IMU라 불리는 관성센서를 이용하는 것으로, 관성센서는 각속도, 가속도, 지자기 등을 측정해 자신의 움직임을 역산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그 대상에 관성센서를 부착한 뒤, 센서의 신호를 통신으로 받아 그 대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오늘날 여러 웨어러블 장비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대상에 무언가를 부착하는 대신 카메라와 같은 외부 장치로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확한 위치 추적을 위해 3차원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깊이 카메라(depth camera)가 사용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키넥트가 대표적이다.

니오바는 음악을 연주하는 이가 손가락의 다양한 제스처를 통해 여러 이펙트를 줄 수 있게 만들었다.

2) 블랙박스 VR 과 이카로스(Icaros)
VR 은 이제 흔히 사용하는 기술이 되었다. 이론적으로 한 사람의 시각과 청각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실감나는 영화나 오락을 넘어 실로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낮은 해상도에 따른 현실감의 부족과 멀미, 헤드셋 착용의 불편함 등의 이유로 그 잠재적인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 소개할 블랙박스 VR 과 이카로스는 운동(Fitness) 분야에 이 기술을 이용했다.

2-1) 블랙박스 VR
사용자는 팔에 센서 역할을 하는 토시를 착용한다. 그리고 헤드셋을 쓸 경우 이제 그는 가상의 경기장에 보내진다. 이 상태로 운동장비를 가지고 사용자는 가상의 상대와 싸울 수 있고, 직원의 말에 따르면, 다른 지역의 실제 사용자와도 대결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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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품은 개인용은 아니다. 지역별로 이 기기를 가진 체육관(Gym)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3) 이카로스
이카로스는 CES를 통틀어 가장 가지고 싶은 제품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플랭크 운동을 하늘을 나는 경험과 연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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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당시 전시장에서 이야기한 이 제품의 가격은 $9,200 달러로 약 천 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홈페이지에 올라온 홈 버전의 가격은 2,380유로로 300만원 정도로 내려왔다.

8. 가방아 가방아

[2018.12.16] 중고 직거래 앱을 이용해 보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218029006

겨울을 맞아 안 입는 옷을 정리하려고 동네 사람들끼리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해 보았다. 시험 삼아 몇 년 전 미국에서 산 트렌치코트를 5만원에 올려보았는데 밤 11시였음에도 1분 만에 팔렸다.

흥미가 생겨 몇 년 전 구매한 뒤 잘 입지 않던 모직 코트를 6만원에 올렸는데 1분도 지나지 않아 이웃에 사는 아들과 엄마가 집으로 찾아와 사갔다. 몇 년 된 파카도 5만원에 올렸더니 이번에는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연락이 많이 왔다.

시장은 신호의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는다. 판매자는 가장 높은 가격을 받으려 하고 구매자는 가장 낮은 가격을 지불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가 제품에 매기는 가치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된다. 구매자마다 그 제품에 부여하는 가치, 곧 최대 지불 가능 가격이 다르므로 판매자는 충분한 시간 동안 여러 구매자의 구매 의사를 살핀 후 자신의 제품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구매자를 찾을때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한 세 번의 거래는 분명한 실패다. 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면 더 긴 시간 동안 더 많은 이들이 제품을 본 뒤 몇 번의 역제안을 받으면서 좀더 진짜 가격에 가까운 값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나는 가격을 너무 낮게 측정했다. 실패의 이유를 분석해 봤다.

우선 돈과 기분의 상대적 가치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어떤 이들은 누군가 쓰던 제품이 새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냥 새것을 사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싼 제품을 찾는다. 옷의 경우도 많은 이들이 중고라는 점을 별로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적당히 싸고 적당히 괜찮은 옷을 사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첫 번째 거래에서 코트를 사간 사람은 자신이 해당 브랜드의 팬이라 말했다. 모직 코트 브랜드의 경우는 과연 팬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6만원으로 가격을 정했다. 그런데 정작 코트를 사간 사람은 고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였다. 내일이 아들의 면접이라 옷이 필요했는데 좋은 옷을 싸게 줘서 고맙다며 아이에게 코트를 입히고(내가 보기에는 조금 작아 보였지만) 가져갔다.

셋째, 생각보다 사람들은 면밀한 조사를 하지 않는다. 파카를 5만원에 올린 것은 그 제품이 구형이고 지금 인터넷으로는 최신 모델을 22만원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올린 파카는 몇 년 전 제품이며 새것이라도 15만원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서 두 번의 경험이 있음에도 5만원으로 책정했는데 첫 번째 예약자가 30분 뒤 차를 타고 가지러 올 때까지, 먼저 예약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에게 팔아달라는 대기자가 6명이나 생겼다.

마지막으로는 검증 효과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 이성에게 더 인기 있는 것처럼 누군가 이미 선택했던 옷이라는 사실이 중고 물품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듯하다. 모직 코트를 뒤늦게 보고 연락을 준 사람은 그 옷이 이미 팔렸다고 하니 ‘다른 코트는 파실 것 없나요 T.T’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모두들 자신이 중고 시장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선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옷을 사러 온 모두에게 어떻게 글을 올린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연락을 줄 수 있었는지 물었다. 모두 한결같이, 마침 그 순간 우연히 자신이 그 앱을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다.

[2018.11.04] 생각의 차이를 참을 수 없을 때

며칠 전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회사 생활과 불교 사상의 흥미로운 관계에 대한 글을 보았다.

“회사 생활은 모든 것이 고통이고(일체개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무리 치열하다 한들 사실은 다 무상한 것이며(제행무상), 진정한 나란 그곳에 없음(제법무아)을 깨달아야 한다.” 적절한 비유에 많은 이들이 동의를 표했고 나 역시 내용을 음미하며 즐거움을 잠시 만끽했다. 그리고 곧바로 ‘왜 사람들은 서로 의견이 일치할 때 이를 기뻐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의 일상은 생각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모든 것은 타인의 생각을 파악하고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SNS의 시대에 특히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수 있게 된 만큼 자신의 의견과는 다른 타인의 의견을 보았을 때 이를 바꾸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는 것이다.

물론 매우 희귀하게 자신의 독창적인 의견이 널리 받아들여져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고 들인 시간과 노력의 보상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지성과 논리는 생각하는 것만큼 뛰어나지 않으며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 헛물을 켜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효율적인 노력을 반복해 경주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어쩌면 이 욕망, 곧 의견의 일치를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에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의견의 일치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로 인해 타인과의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고통으로, 의견의 일치에 대해서는 기쁨으로 반응하게 되었으리라.

어쩌면 원시 부족사회에서 의견이 일치된 부족이 그렇지 않은 부족에 비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거나 타인과 마주쳤을 때 적과 아군을 판별하기 위해 특정한 문제에 대한 의견 일치 여부를 따졌을 수 있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죽여 온 역사이며 20세기까지도 자신의 종교나 정치적 정체성으로 생존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이라도 종교와 정치를 대화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오래된 연장통’의 논리에서 간단한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래된 연장통’은 과거의 환경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우리의 본능을 말하며 따라서 현대의 삶에 이를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이성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의견의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참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의견의 차이가 만드는 고통에 의한 충동을 자제하고 그 의견이 정말로 나의 안위를 위협하는 의견이 아니라면 타인의 의견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데나 힘쓰라는 것이다.

‘법인’은 불교의 핵심을 말하며 네 가지 법인을 사법인이라 일컫는데 여기에는 서두에서 언급된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에 번뇌를 극복하는 이상적 상태를 일컫는 ‘열반적정’이 더해진다. 우리가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열반적정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2018.09.16] 투노오나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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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리며 심리학 분야의 고전이 된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은 인간의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을 넘어 실제로 우리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인 상호성의 경우, 치알디니는 인간은 호의에 대해 호의로 답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세일즈맨들은 이런 인간의 본능을 이용해 작은 호의를 먼저 베푼 뒤 물건을 판매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의 전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단순히 세일즈맨에게 놀아나지 않기 위해 일상의 모든 호의를 거부하는 차가운 인간이 돼서는 안 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치알디니의 깊이가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호의에는 호의로 답하라. 그러나 그 호의가 내 보답을 노린 호의로 판단된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아라.”

즉 치알디니는 인간이 자신이 가진 오류를 앎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는 지식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아는 것(To Know)이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항하는 ‘모르는 게(Not To Know) 약’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지식에 대한 이 두 가지 가치관의 대결로 덮여 있다.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계몽의 핵심이며, 오늘날 과학 문명의 정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지를 존중하는 가치관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차라리 그 사실을 몰랐었다면’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지식이 오히려 함정이 되는 경우 또한 현실에서 숱하게 마주친다.

1990년대 홍콩발 도박 영화 붐의 정점을 찍었던 ‘지존무상’의 마지막 대결에서, 주인공은 부상으로 일촉즉발의 도박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떠나며 부인에게 바닥에 덮어 둔 패를 보지 말되, 자신의 진짜 패는 아주 약한 패지만 강한 패인 척 행동한다면 상대가 속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대방은 부인의 긴장한 모습을 보고 그녀가 약한 패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해 전 재산을 걸게 된다. 그러나 부인이 가진 패는 사실 강한 패였고 결국 주인공은 승리하게 된다. 부인이 자신의 진짜 패를 알았다면,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일상에서 우리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나 운, 또는 운명에 기대는 마음을 가지고 주사위를 던져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려 할 때, 우리는 사실상 이런 무지에 굴복하는 것이다. 복권을 살 때, 도박에 가까운 판단을 내릴 때, 심지어 스포츠(공은 둥글다!)에 열광할 때 우리는 무지 진영의 유산을 이어받는다.

지식의 진영은 더 많은 지식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생각하며, 인간이 끝없이 정진할 수 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삼는다. 반면 무지의 진영은 전통을 고수하고 절제와 겸손을 강조하며, 인간을 본래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물론 지식의 진영이 이룬 과학의 발전이 다시 인간이 가진 수많은 한계를 밝혀내며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마 세상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8.08.05] 삼중 소셜 다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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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서울신문 6월 26일자)에서는 많은 현대인들의 고민인 ‘비만’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들을 ‘이중 소셜 다이어트’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비만은 칼로리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발생하는 현상인 만큼 우선 공급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인생의 매우 중요한 즐거움인 타인과의 식사가 주는 기쁨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공급 제한을 이룰 수 있는 ‘혼밥 금지’라는 첫 번째 축과 실현 과정에서 개인 의지가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감시를 하고자 하는 ‘공개 선언’이라는 두 번째 축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지난 6주간 체중 5%를 줄였다. 이는 당초 제시했던 최종 목표의 절반에 해당한다. 물론 실험 대상은 필자 한 명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라 믿는다. 이런 수치 변화 외에도 생활 습관 측면에서 여러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특히 제목처럼 소셜 다이어트에 적용 가능한 새로운 요소 하나를 발견했기에 이를 다시 한번 나누려 한다.

첫 번째 축인 ‘혼밥 금지’, 혼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결심은 생각보다도 매우 강력한 원칙이었다. 이 한 가지 심리적 장벽은 그동안 틈틈이 간식을 얼마나 많이 먹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지난 6주 동안 기록은 첫 번째 원칙을 지킬 수 있었던 날이 절반 정도에 불과함을 말해 준다. 그러나 오히려 절반이나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번째 축인 ‘공개 선언’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첫 번째 장벽을 무시하고 무언가를 입에 넣으려 할 때 이를 누군가가 볼 수 있다는, 곧 내 의지가 시시각각 타인의 실험대에 올라간다는 자각은 항상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했다.

새로 발견한 세 번째 축은 뭘까? 이 요소는 의외로 효과가 매우 커 스스로도 놀란 것이다. 바로 ‘경쟁’이다. 다이어트를 절반 정도 진행했을 때 마침 대부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또래 친구들의 단체 메신저에서 한 친구가 자신의 다이어트 진행 상황을 공개하면서 서로를 자극하게 됐다. 특히 늦은 밤처럼 의지력이 약해지기 쉬운 취약 시간을 견디는 데 이런 추가적인 장벽이 크게 도움이 됐다. 새로 소셜 다이어트를 시작하려는 이들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지인들과 모여 이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경쟁 요소를 더함으로써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십 수 년 전 처음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졌을 때 가장 와닿았던 말은 자신의 체중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라는 것이었다. 식습관 외에도 운동, 수면, 규칙적인 생활, 그리고 스트레스, 건강 상태 등이 모두 작용해 하나의 숫자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다이어트는 자기자신이 몸의 주인임을 새삼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때마침 지난 5월 MIT 연구진은 쥐에게 24시간 먹이를 주지 않았을 때 줄기세포의 재생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런 결과가 인간에게 반드시 적용된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소식(小食)이 건강에 이롭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받을 것이며, 다이어트의 중요성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8.06.24] 이중 소셜 다이어트

인생은 결심과 포기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결심하는 나’와 ‘포기하는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결심이 일어나는 동안 머릿속은 미래의 나에 대한 기대감과 이런 결심을 세운 자신에 대한 대견함, 그리고 어떤 욕망과도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포기는 불시에 찾아오며 상황이 완료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이유를 찾는 데 매우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결심을 포기하는 순간의 인간은 이런 재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떻게 ‘포기하는 나’를 이길 것인가, 적어도 어떻게 포기를 늦추어 최대한 결심과 포기 사이의 기간을 늘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자신과의 싸움을 돕는 수많은 방법 중 AA라 불리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모임에서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AA는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한 이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다. AA에 참석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게 되며, 또한 다음 모임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때까지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AA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사회성을 자신과의 싸움에 활용하는 방법이다.

결심을 쉽게 어길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결심이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규칙일수록 ‘포기하는 나’는 집요하게 예외를 찾아내고, 한 번 만들어진 예외가 얼마나 쉽게 원래의 결심을 무력화시키는지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다이어트에 적용해 보자. 다이어트에 있어 적게 먹는 것, 곧 칼로리 섭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루 중 16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 16시간 단식이나 1일 1식 등은 모두 식사량을 줄이는 간헐적 단식의 한 방식으로, 이를 지키기 쉬운 단순한 형태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나 횟수를 기준으로 원칙을 정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바로 사회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타인들과의 식사 약속이다.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사회적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타인과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적이 아님을 확인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버핏 같은 유명인과의 기록적인 점심 식사 경매가나 밥 한 끼를 간절히 원하는 젊은 남녀들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이어트를 위해 다른 사람과의 이런 기회를 피하는 것은 마치 앞뒤가 바뀐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며, ‘포기하는 나’가 쉽게 파고드는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칼로리 섭취는 줄이면서도 타인과의 식사를 통한 즐거움은 놓치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신을 속이지 못할 정도로 단순한 원칙을 찾던 중 필자는 마침내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답은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이 원칙을 잘 지키기 위한 한 가지 장치를 더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결심을 밝히고, 그 결과도 밝히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소셜 다이어트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회성을 만족시키고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뱃살과 체중계 숫자가 같이 늘어가는 흔한 40대가 고민 끝에 신문 지면을 이런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주저함을 이기고 용기를 내어 본다. 지금 체중계는 3의 4승을 가리키고 있다. 목표는 2의 3승에 3의 2승을 곱한 값이다. 다음번 칼럼이 나가는 6주 뒤에 지면을 통해 세계 최초의 이중 소셜 다이어트 실험 결과를 보고할 예정이다.

[2018.05.13] 자기 참조의 마법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은 말을 한 사람이 크레타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논리학, 수학, 전산학 등 다양한 학문에 등장한다. 화자가 크레타인이므로 그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며 따라서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다시 거짓말이 되어 결론적으로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되는 끝없는 모순을 낳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이를 수학 문제로 바꿔 표현했다. 위 문장은 사실 ‘이 문장은 거짓이다’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러셀은 이런 모순이 바로 해당 문장들이 ‘스스로를 참조’하기 때문임을 보였다. 러셀이 든 예 중에는 ‘자신의 머리를 깎지 않는 사람의 머리만을 깎아 주는 이발사’가 있다. 이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를 깎아야 할까, 깎지 않아야 할까.

이런 자기 참조는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프로그래밍을 배울 때 등장하는 ‘재귀 함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특정한 문제, 예를 들어 어떤 자연수에 대해 그 자연수보다 같거나 작은 모든 자연수들을 곱한 값을 의미하는 팩토리얼을 계산할 때 재귀는 이 과정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이다. 무언가를 가장 간단하게, 가장 적은 비용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수정란이라는 세포 하나로부터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층위의 자기 참조 과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자기 참조는 이야기의 액자 구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깥 이야기 속에 내부 이야기가 존재하는 액자 구조는 이야기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기 참조를 하게 된다.

인간은 오랫동안 누군가로부터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들어 왔기에 그 복잡성과 무관하게 이를 쉽게 이해하고 즐길 뿐 아니라 다시 자신의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자기 참조는 일상의 의사소통을 부드럽게 만드는 용도로도 쓰인다. 어떤 이야기를 직접 꺼내기 어려울 때 우리는 다른 누군가 그런 말을 했거나 들었다고 말하며, 또는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이렇게 느끼겠지요’라는 추정에 상대 입장을 추가한 표현으로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도 한다.

수사학에는 이를 좀더 발달시킨 방법이 있다. 무언가를 직접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사학은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바로 ‘아포파시스’와 ‘아포시오페시스’이다. 아포파시스란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그 내용을 꺼내는 방법을, 아포시오페시스는 상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연상하게 만들지만 정작 말을 멈춤으로써 화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상기시키는 방법이다.

아포파시스의 가장 유명한 예는 미국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TV토론회에서 자신의 나이에 대한 공격을 멋지게 차단하고 시청자 모두를 즐겁게 만든 것이다. “나는 이번 선거운동에서 나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상대방이 젊고 경험이 부족한 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참조의 마법은 이런 식으로 일상의 대화에 쓰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재치가 있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곤란했던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될 때”라는 답은 구체적 시점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남을 배려한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느냐”는 질문에는 “이런 질문에 멋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지금까지 접했던 문제 중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보았지만 그중 가장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 같다”는 대답을 했으면 어땠을까.

[2018.04.01] 외모가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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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랑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있어?”

가끔씩 쓸만한 질문을 던지는 둘째의 말이다. 최근 ‘무엇이든 알고 있는 아빠’라는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기에 이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내공을 쌓은 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으로 시간을 벌어 보자.

“‘똑같다’의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철학에 충실한 답변이다. 너무 충실해서 문제다. 이런 식으로 넘겨 온 수많은 위기가 떠오른다. 순간적으로 한 답변치고는 핵심을 짚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걸로 답을 했다고는 할 수 없는 만큼 더 구체적인 설명을 준비해야 한다.

“완전히 똑같은 사람 말이지.”

예상대로 바로 반응이 온다. 이참에 같다와 다르다라는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를 구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줄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완전히 똑같은 건 거의 없다고 보면 돼. 사람 얼굴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는 다시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니? 그 세포와 원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바뀌고 있거든. 1년 전 사진 속 네 모습이랑 지금 모습이 다른 것처럼 같은 사람도 매일, 아니 매 순간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이 완전히 똑같을 수 있겠니?”

조금 지나친 것 같지만 적어도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일단 말해 준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아이가 원래 알고 싶어 했던 내용은 아니다.

“아마 네가 알고 싶었던 건 보통사람이 보기에 구별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일 텐데 그건 더 어려운 질문이야. 왜냐하면 우리 중엔 다른 사람을 잘 구별하는 사람도 있고 잘 구별 못하는 사람도 있거든.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지. 그리고 사람들은 같은 인종의 사람을, 같은 나이대 사람을 더 잘 구별하기도 해.”

이번 설명의 핵심은 20세기 물리학의 성과 중 하나인 관찰자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는 격언처럼 상식에 가까운 사실일 것이다. 관찰자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환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줘야 한다.

“게다가 조명이나 분위기처럼 그 사람을 보게 되는 상황, 그리고 분장이나 화장, 복장 같은 요소와 그날 그 사람의 건강 상태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단다.”

사실 아이의 첫 질문은 생체인식과 인증이라는 기술 분야와 연결돼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유사 이래 늘 중요한 문제였다. 본인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선 서명이나 도장이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책에는 돌이나 칼을 쪼갠 징표의 단면을 서로 맞추어 상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자주 등장한다. 일종의 비밀번호인 셈이다. 공적인 증명을 위해서는 인체 특징을 직접 활용하는 지문도 사용됐다.

오늘날 첨단 문명을 상징하는 스마트폰 역시 처음에는 비밀번호였고, 그다음은 지문이었으며, 이제 얼굴이 사용되고 있다. 결국 공학 관점에서 핵심은 두 신호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이며, 해상도, 맞는 사람을 확인하지 못하는 1종 오류, 틀린 사람을 그 사람으로 착각하는 2종 오류 같은 개념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초등학생에게 하기에는 아직 이를 것이다. 결국 보통 사람이 보통 환경에서 어느 정도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해 주어야겠다.

“아빠가 전에 유전자라는 게 있어서 사람의 많은 특징들을 정해 준다는 이야기를 했지? 쌍둥이들은 그 유전자가 똑같다고 했고. 하지만 쌍둥이들도 잘 보면 얼굴이 조금씩 다르단다. 자라면서 환경이 조금씩 달라서 얼굴이 바뀐 거지. 아빠 생각에는, 정말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을 것 같네. 정확히 말하면, 보통 사람의 구별 능력이 그 정도는 될 거라는 이야기지. 물론 아까 말한 것처럼 다른 인종이거나, 화장 같은 특별한 상황은 제외하고 말이야.”

[2018.02.18] 전자공학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는가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제품전시회(CES)를 다녀왔다. 가전제품이라는 단어는 냉장고나 세탁기, 텔레비전, 비디오 등의 제품을 연상시키며 실제로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행사에서는 그런 몇몇 제품들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신제품으로 전시되던 행사였다. 그러나 요즘 CES에는 자동차에서 스마트 칫솔에 이르는 일상의 거의 모든 제품이 전시된다. 전시회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전자공학은 세상을 어떻게 이처럼 정복할 수 있었을까.” 물론 간단한 질문은 아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왜 어떤 대륙은 다른 대륙보다 발전 속도가 느렸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며 ‘총, 균, 쇠’ 같은 두꺼운 책을 써낸 것 못지않은 분량의 책을 누군가는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이란 단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기술을 하나의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바꾸는 방법으로 정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엔진은 연료가 가진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다. 에너지의 종류에는 빛, 열, 소리, 운동, 화학에너지 등이 있으며 인간도 음식물이 가진 화학에너지를 체온 유지를 위한 열에너지와 이동을 위한 운동에너지, 의사소통을 위한 소리에너지 등으로 바꾸는 기계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기에너지가 이런 에너지들 중에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전기에너지는 전선으로 연결 가능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에너지를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기의 발명 이전까지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집을 덥히기 위해 산에서 땔감을 가져와야 했고 수력에너지를 이용하는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전기는 언제 어디서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전기에너지의 또 다른 특징은 전기에너지와 다른 에너지 사이의 변환이 매우 쉽다는 점이다. 에디슨의 전구는 전기에너지를 빛에너지로 바꾸는 기술로 인류를 어둠에서 해방시켰다. 전동기(모터)는 전기를 동력이라는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다. 운동에너지를 전기로 바꾸는 발전기는 다른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쉽게 바꿀 수 있게 해 준다. 화학, 수력, 원자력 발전소는 모두 물질이 가진 화학에너지, 위치에너지, 원자력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 후 다시 전기에너지로 바꾸어 도시로 전송한다. 물론 전기에도 단점은 있다. 자동차나 배, 항공기처럼 전선을 연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를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운송수단이나 장치들은 화학에너지가 담긴 석유를 곧바로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엔진을 사용했다. 스마트폰과 같은 휴대품들은 전기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 배터리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배터리 기술의 발전은 배터리를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바로 쓸 수 있는 전기자동차의 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너지원으로서의 전기의 장점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가전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큰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전자공학이라는, 전기를 정보의 처리에 사용하는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를 넘어 집적회로가 등장했고, 전자의 이동을 통해 계산, 곧 정보를 가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 미묘한 전기나 전파의 변화를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기술의 발달은 정보가 담긴 신호를 공간적 한계 없이 빛의 속도로 전달할 수 있게 되어 세상의 변화 속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무선통신이 등장했으며 드디어 스마트폰이 나타나 모든 인간은 연결됐다. 그리고 사물인터넷(IoT)으로 모든 사물과도 연결되고 있다. 이런 전기에너지의 특수성, 그리고 전기를 이용한 정보처리 기술의 발달이 바로 전자공학이 세상을 정복하게 된 비밀이다.